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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

번아웃보다 더 힘든 일

by 김혜정


집 앞 한의원의 한의사가 말했다. 더 늦기 전에 잘 왔다고. 더 늦게 왔으면, 그리고 지금처럼 그렇게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바쁘게 살면 어느 날 갑자기 중풍이 올 수도 있는 거라고. 지금처럼 직장일 하고 교회 일하고 아들 공부 가르치고 집안일 혼자 다 하다가는 나중에 남편이 수발들 날 올 수도 있는 거라고. 나도 9시에 진료 끝나고 집에 가면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집안일 다 한다고.


나는 물었다.

“선생님 사모님은 그럼 뭘 하시나요?”

“우리 와이프야 아들 키우죠.”

“아들이 몇 명인데요?”

“아들 하나죠~.”


아들이 지금 6살이고 하나지만 그래도 요즘 애 키우기가 얼마나 힘드냐고. 그래서 나는 집에 가면 집안일 알아서 한다고. 당장 남편한테 가서 내가 그랬다고 하고 집안일 나누라고. 그리고 강요할 순 없지만 교회 봉사도 내려놓으라고.

그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헐, 나 이렇게 살다가 중풍 맞을 수도 있다는 게 사실이야? 그래, 내가 너무 피곤하게 살고 있긴 하지. 힘들어도 다 내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서 힘든 게 힘든 줄 몰랐던 거야. 의사 선생님 말씀처럼 난 다른 보통 사람의 네다섯 배로 일하면서 살고 있었나 봐. 난 진짜 몰랐다. 내가 열심히만 산다고 생각했지, 미련하게 살고 있을 줄이야.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남편도 허걱하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들들을 불러 모아 앉히고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요즘 많이 힘들어서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냈고 한의원에서 ‘구안와사’ 전조 증상이라는 소견을 받았노라고. 구안와사라는 건 얼굴의 한쪽이 돌아가면서 마비되고 그러면 눈 깜박임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입도 돌아가서 밥 먹는 것도 부자연스러워지며 혀도 말을 안 들어서 발음도 정확히 할 수 없게 되는 거라고. 그러니까 아빠도 집안일을 해야 하지만 너희들도 서로 돌아가며 집안일을 거들어야 한다고.


다들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누가 땡!이라고 말해 줘야 풀려날 것 같은 얼음이었다. 나도 심란했다.


그 후로 나는 집안일을 1/4로 줄였고 남편과 아이들은 서로 요일을 정해가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10년 간 해왔던 교회 봉사도 그만두었다. 아들들이 5살, 1살이었을 때 김포로 이사를 오자마자 시작한 유치부 봉사가 벌써 10년이 되었고 구역장의 직분까지 받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봉사는 사실상 무리였다.


구안와사라는 병명이 너무 무섭고 두렵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 당시 두 명의 주변 지인에게 구안와사가 왔다는 얘길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분은 둘째 아들의 친구 엄마였고,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털털한 성격의 그녀는 처음 만난 엄마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본인이 현재 구안와사라는 병에서 회복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시댁 일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던 시기가 있었는데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얼굴 반쪽이 뻣뻣했고 감각이 없어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옆으로 확 돌아갔다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너무 놀라서 한의원에 가보았더니 구안와사였다고.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양방으로도 가보았지만 양방은 무서워서 한의원에서 꾸준히 침을 맞았다고 했다. 그 이후 조금씩 호전되어 이제는 거의 나았지만 완전히 낫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또 한 분은 남편의 직장 동료였다. 그도 역시 나와 동갑. 어찌 이리 나와 동갑인 분들만 구안와사에 걸렸단 말인가. 그분도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얼굴이 확 돌아갔는데 마스크를 끼고 강의를 했기 때문에 처음엔 사람들이 알아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점점 마비 현상이 심해지고 눈깜박임을 본인 의지대로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쯤, 눈치가 느린 우리 남편도 어느 정도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을 정도 상태가 심각해졌고 어느 날 갑자기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그는 겁을 많이 먹어서인지 너무 시간을 지체한 나머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수술을 받고 다시 학원으로 복귀했지만 살짝 부정확한 발음과 여전히 둔한 얼굴 감각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


하... 나도 몸을 돌보지 않고 예전의 에너자이저인 줄로 착각하고 살다가는 큰 아픔이 올 수 있겠구나... 내 외모에 문제가 생기고 자존감이 하락하고 일도 못하고 집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 이게 재작년 1월의 일이다.


3년 전 겨울부터 이상하게 눈떨림이 생겼다. 파르르 떨리기도 하고 개구리가 울 때 볼 밑을 부풀리듯 눈 위아래 부위가 솟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하는 느낌으로 불뚝거리기도 했다. 내 느낌은 너무 큰데 막상 거울을 보면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래도 밥 먹을 때나 웃을 때 얼굴 근육을 움직이면 불규칙적으로 눈 위아래가 지 마음대로 흔들리는 건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몸도 지쳐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정신이었다. 적잖이 번아웃이 된 상태였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그냥 열심히 살다가 코로나가 터지고 많은 것들이 흔들리면서 아들의 공부에 내 발목이 잡히고 인간관계가 얽히고설켜 쇠사슬처럼 꼬였을 때 나에게 번아웃이 왔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나를 마구 뒤흔들었다.


가장 날 힘들게 했던 건 인간관계였다. 나는 인간관계에 취약하다.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뭐든 남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 왔었다. 학창 시절에도 학원 강사 시절에도 친정에서도 시댁에서도 지인들 사이에서도 최대한 맞추며 살았다. 거절도 못 했다. 내가 거절을 한다는 건 타인도 나를 거절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에 늘 받아들이기만 했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내가 정말 애정했던 모임에서, 내가 4년 동안이나 헌신적으로 수용해 주었던 사람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알고 지낸 것은 7년이었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4년이었다. 처음엔 가벼운 일상 이야기였다. 아이들 이야기, 학교 이야기, 학원 이야기가 주였다. 조곤조곤 말투라 대화 시간은 조금 느릿했지만 불쾌한 이야기는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도 들고 누가 봐도 절친이었다. 그러나 실제 성격은 나와는 상반된 사람이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인품은 좋은 사람이었기에 나와 다른 점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나는 계획적이고 시간을 허투루 쓰는 걸 싫어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걸 중요시했지만 그 사람은 충동적이었고 감각적이며 시간관념이 없어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수용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얘기하는 걸 즐겨했고 나도 남의 얘길 경청하며 호응해 주는 것만으로도 보람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1주일에 사나흘을 1시간씩 경청하는 일이 반복되자 그것은 점점 나에게 십자가와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수업을 하는 도중에도 전화가 와서 방해가 된 것은 예삿일이요, 아들 공부를 시키는 중에도, 가족 여행을 가서 아들들과 배드민턴을 치는 중에도 전화가 오면 끊지를 못했다. 손목이 부러져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아침 식사가 나오기 직전 7시 반에 전화가 와서 수술한 손으로는 링거대를 밀고 반대 손으로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부리나케 휴게실로 이동해야 했다. 비몽사몽이었지만 5분만 통화하자는 그 사람의 말을 그때의 난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통화는 30분이 되고 같은 병실의 아주머니들께 핀잔을 들으며 늦은 아침 식사를 마쳐야 했다.


그렇게 통화는 습관이 되고 이제 나는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아들 공부도 가르쳐야 되고 남편도 퇴근해서 끊어야 한다고 넌지시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단호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너 아니고서는 누구한테 말할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내가 지쳤던 건 물론 긴 통화 시간에도 있었다. 통화를 길게 하는 걸 싫어하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통화 내용이었다. 내용은 처음처럼 가볍고 일상적인 것보다는 훨씬 무겁고 듣기 어려운 수준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였고 우리 얘기가 아닌 남 얘기였다. 왜 나에게 이런 십자가가 지어지는가, 무수히 한탄했다.


내가 심각하게 고려한 진로였던 상담사의 길은 4년 간의 모진 경험으로부터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결론을 내는 상담을 좋아했을 뿐, 반복되는 부정적인 말들을 하염없이 경청해 주는 상담사는 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쳐갔지만 그 사람은 알지 못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얘기를 좀 해 봐~ 라고 두어 번 얘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내 마음이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 이후엔 여기 적을 수 없는 다른 사건이 터지면서 나는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카톡방을 떠났고 마음을 비웠다. 다른 사람들과는 만나지만 그 사람과는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난 여태껏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에게 들은 ‘여태까지 너처럼 못된 사람은 처음 본다. 지나가다 마주쳐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을 거다‘라는 말 내 가슴에 꽂힌 화살이었다.


내가 그동안 쏟아부었던 정성과 배려는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관계에 대해서 재해석하게 되었고 이제는 내가 상처받을 관계라면 정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브런치를 알게 되었고 서서히 나는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하면서도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땐 때가 아니었다. 지금도 물론 때가 맞는 것은 아니다. 때는 없다. 가슴에 영원히 묻으면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며칠 전 그 사람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심장이 쿵 했다. 아들과 교복을 맞추러 가는 길이어서 운전 중에 받았다. 고입을 축하한다며 안부가 궁금해서 한 거니 나중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하루가 일주일 같았다. 신경이 쓰였고 눈가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론 난 구안와사에 걸리지는 않았다. 양방에도 갔고 한의원에 다니며 오랫동안 침을 맞았다. 한약도 몇 번 먹었다. 다른 한의원에도 갔었는데 다른 한의사 선생님은 이건 병이 아니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잠이 부족하면 심해지는 증상이니 평생 관리해야 할 일이라고, 내 몸과 동반해서 가는 동반자라고 했다. 스트레스가 과하면 눈떨림이 심해진다. 왼쪽 얼굴도 뻣뻣해지고 가끔 입술도 샐쭉거린다. 그것도 왼쪽만. 재작년 1월에 처음으로 한의원에 갔을 때의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


고민 끝에 나는 문자를 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다시 연락하는 건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건강과 새해 복을 기원했다.

진심으로 축하해 준 건 고맙고 다시 전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이나 다른 부탁할 일이 있거나 뭔가 할 얘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내 몸이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 반응하니 내 몸을 먼저 지켜야 한다.


문자를 하기 전에 브런치 작가님들께 조언을 구할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냥 속으로 기도했다. 각자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더라도 신은 아시고 나 자신은 아니까. 나는 그 사람을 끝끝내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인연을 다시 맺는 것은 힘들다. 다시 나를 곤궁에 빠지게 하는 것은 나를 스스로 방치하는 것이다. 이게 2년 전, 40대 중반에 내가 깨달은 하나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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