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하나와 찰나의 기쁨
�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 그리고 창백한 푸른 점 (Pale Blue Dot)
� 거대한 '우주' 안에 프랙탈처럼 '소우주'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뇌.
� 자연 현상이란 가장 쉬운 방식으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것.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우주다.
�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코스모스를 우리가 원하는 코스모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 과학,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통찰을 얻고 그것을 칼 세이건의 방식으로 풀어낸 저서
�독서See너지
▶ 도서 : 종의 기원, 총균쇠, 사피엔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픽션들, 아리스토텔레스
이게 정말 사과일까_요시타케 신스케미하일 엔데 저서
▶ 영화 : 익스팅션-종의 구원자', Arrival (컨택트) 외 다수
▶ 음악 : Space Man_Sam Ryder, Mikrokosmos_BTS, Carolina_Taylor Swift (가재가 노래하는 곳)
어릴 적, 닳고 닳도록 읽었던 문학 전집과 과학 전집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내가 읽기엔 판형도, 글자 간격도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책들이었지만, 무척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어렴풋이. 그렇다고 앉아서 책만 읽는 어린이는 아니었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도 곧잘 뛰어 놀던 또래 아이였다. 과학은 특히 천문학 분야를 자주 꺼냈다. NASA (영화 히든피겨스처럼)를 향한 원대한 꿈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상상의 나래를 곧잘 펴곤 했다. 물론 과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과학과 다른 진로를 택했고, 지금의 나는 그저 내 삶을 사랑하고 만족하는 어른으로 자랐지만, 문득 그 어린 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접했더라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하늘의 별과 달에서 땅 위의 하루살이와 도마뱀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경이로운 체험과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의 학문은 아크로폴리스 언덕과 그 위 파르테논 신전처럼 역사 속에서 무수한 변화를 겪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21세기의 뇌과학이나 진화생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통찰이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조대호 저자의 글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그가 정립한 이론들 때문에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이 맞든 틀리든, 아리스토텔레스만이 할 수 있는 '대체할 수 없는 통찰'을 해내었기에 오래도록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의 경우 직접 탐험하고 관찰함으로써 자연의 수많은 선택 과정이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을 해왔음을, 또한 생명 진화란 수직적인 위계가 아닌 수평적 펼쳐짐(unfolding)의 단계로 전개된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이 책 역시 방대한 분량보다 더 대단한 것은 과학,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통찰을 얻고 그것을 칼 세이건의 방식으로 풀어서 전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요즘은 인문+과학을 접목한 책들과 학자들, 무림의 고수같은 일반인들까지 찾아 볼 수 있을 정도가 됐지만, 다양한 분야를 관통하는 통찰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짜릿하다.
길들여지면 편안하지만,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설게 보려는 마음만으로도 세상은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하나의 관념이 무너지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도 잊지 말자. 우주적 관점에서 창백한 푸른 점 하나에 불과한 지구에서 그 보다 작은 나로 살아가는 것이 때론 고달플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너로 살아가는 것도 참 이상하다. 어릴 적 쌓고 부수고 다시 쌓는 장난감 놀이처럼 나의 형태는 무수한 변화를 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발을 딛고 산을 오를 때와 산을 내려갈 때 보는 풍경도 감상도 달라진다. 비행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느낌도 달라진다. 산이나 세상이나 그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이를 감상하는 이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은유되고, 표현되기에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 이해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은유된 이치가 아닐까. 알아도, 몰라도 세상 사는데 전혀 지장은 없지만, 이렇게 좋은 통찰을 접할 수 있는 양질의 책은 누군가 먼저 개척한 생각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멋진 여행이기도 하다.
앤 드루얀을 위하여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결국 이 문장 속에 코스모스의 섭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이론을 접하고, 외우고 기억하며 토론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뭐니뭐니해도 무엇을 느꼈는지다.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 나오는 표현처럼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 대며 음미' 하듯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그 감각을 다시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먹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기쁨'이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책을 읽는 동안도, 책을 읽고 나서도 특별한 의미들이 다가오게 되므로.
이 책의 한 챕터 중에 애플 파이 자르기를 하면서 무한소와 무한대 이야기 부분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수학자 에드워드 캐스터가 아홉살짜리 조카에게 지극히 큰 수의 이름을 지어 보라고 해서 10의 100 제곱을 '구골 Googol'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9장에 나온다. 10의 구골제곱을 '구골플렉스'라고 부른다고 이름으로 Flex! 게다가 <코스모스>에서 '무한대'란 '그 무엇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라는 뜻.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가 인터넷의 '무한'한 정보를 체계화 하겠다고 이름을 짓다가 철자를 헷갈려서 Google이 되었다는 후문도 있다.
거대한 '우주' 안에 프랙탈처럼 '소우주'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뇌. 구글이나 블로그를 사용하는 네이버와 같이 검색엔진의 등장으로 요즘은 그 사용법도 많이 달라졌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 정보를 굳이 뇌에 차곡차곡 다 저장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앞으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나왔듯이 기억해야 할 내용을 뇌에 그대로 파일을 옮기듯 순식간에 옮길 수 있는 시대도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우주는 별들을 연결짓고 선을 그어 이름 붙인 별자리처럼 생각의 별자리를 그리고 아이디어를 창조하는 것에 더 많이 쓰이지 않을까. 감각을 느끼고, 감정을 표현하는데 더 유용하지 않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여러 영화들도 떠오른다. 스페이스X (SpaceX)와 같은 회사에서 화성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고, 이렇게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으로 눈을 돌린 인간은 '익스팅션-종의 구원자'라는 영화에서처럼 로봇, AI 그리고 화성과 지구의 미래와 그로 인한 윤리적 문제를 돌아볼 때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 영화의 평점과 달리 직접 보면 반전의 걸작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스타일의 SF 네러티브도 감지된다. 마션과 인터스텔라, 컨택트(Arrival), Gravity 등의 영화 등도 찬찬히 보면서, 이 책을 음미하면 더 재밌다. 물론 코스모스 영상도 있지만. 그러고 보면 칼 세이건은 요즘으로 치면 유튜버 같은, 정말 시대를 앞선 인물이다.
별의 생로병사는 한 인간의 그것과 흡사하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양자역학적으로 따져서 원자단위로 쪼개면, 사실 만물의 원자 구성도 같아진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 '이게 정말 사과일까'나 '모모'를 쓴 미하일 엔데는 (갑자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어느 (동화)책에서 이러한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다. 개념 미술 분야도 마찬가진데, 놀라운 것은 그걸 칼 세이건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
결국 원자들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다른 물질이 되는 거라,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도 로봇도 같은 물질일 뿐. 다른 점이라면 감정(Emotions)이라는 것, 또는 정신(Mind)을 갖고 있냐 없냐로 판가름 난다. 앞으로 로봇이나 AI가 감정까지 학습한다면 꽤나 복잡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저서들도 있지만 'A.I.'나 '메간'과 같은 영화들에서도, 앞서 말한 '익스팅션-종의 구원자'에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로봇이 아닌 클론(복제인간) story로는 영화 네버 렛미고 (가즈오 이시구로 원작 소설) 가 매우 흥미로우면서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다.
우리가 본다는 것이 지금 보는 게 지금 보이는 것이 맞을까? 본다는 것은 사실 빛에 의한 시각 활동이다 보니 실제로는 시간차가 있다. 빛이 이동하는 속도를 능가하지 못하는 인간 세상에서 눈은 짧은 거리에 있는 사물을 보기에 동시라고 착각할 뿐. 이걸 우주적 거리로 확장하면... 인터스텔라와 테넷과...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의 상간 함대가 우리 하늘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들과 잘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p506
테드 창 Ted Chiang 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Arrival (컨택트)가 그대로 떠오르는 문구다. 어쩌면 영화나 소설 등 수많은 작품들이 칼 세이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굳이 외계문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역사 속에도 비슷한 일화들이 있었고, 이는 외계 생명체와는 매우 다른 결말을 가져왔다.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를란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로 극찬했던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는 결국 아스텍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고, 기준을 뭐라 할 수 없지만 선진(어쩌면 더 야만) 문명과 후진(순수한) 문명이 충돌해 철저히 파괴됐던 사례들 (아스텍처럼 콜럼버스와 아라와크 족의 만남 등)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다 (p497-506 내용). 이는 꼭 총균쇠를 다시 읽는 기분이다. 블로그에는 아직 리뷰를 올리지 않았지만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도 결이 비슷하다.
태양이 뜨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라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뜨는 것이지 우주적 관점에서는 보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기에, 다양한 관점은 생각의 유연함과 더불어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지혜가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바벨의 도서관'에서 혼돈과 질서에 관해 풀어 놓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은 이 코스모스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
Carolina_Taylor Swift (From The Motion Picture “Where The Crawdads Sing"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이제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을 인간의 언어 중 하나인 수학이나 과학으로 정답을 만들어서 풀어야 하니까 어렵게 느끼는 거지, 사실 자연 현상이란 가장 쉬운 방식으로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코스모스를 우리가 원하는 코스모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하다고 생각됐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제한된 상황에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각국에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더 넓고 큰 맥락에서는 목적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우주를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고 큰 문제인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p538
관계 측면에서도 더 넓고 큰 맥락에서 이해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이지 '제멋대로 판단하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이는 해석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해석의 자유는 누리되, 평가가 아닌, 헵타포드 언어로 표현하면 'Weapon 무기' 대신 'Present 선물'이 되는 것이 좋다. 만약 기준도 없는 해석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칫 잘못된 '투사'(일종의 방어기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이란 것이 그래서 가장 안전하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놀이터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박학 VS 현명은 분명 다르다. 대뇌피질에 의한 직관은 인간을 동물이 아닌 인간이게 한다. 이는 로봇이 아직은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로 데이터의 축적과 학습에 의해 박학다식함은 AI도 가능하다. 어쩌면 어느 정도 현명함까지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인간은 더욱 현명해질 수 있다.
외부의 시선을 통해 칭송(인정)받는 사람이고자 하여 통제하고 억제하려는 것은 오히려 압력만 더 높이게 하고 자잘한 폭발을 일으킨다. 내 안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로써 사용할 때, 이 지식의 진정한 쓸모를 찾을 수 있고, 나를 관찰하고 관조할 수 있다. 시선의 방향을 나를 향해 지혜롭게 옮겨 보자. 심호흡을 하고, 멍 때리기도 해보자. 우리는 자연 그대로의 우주다.
지구는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의 세계이다. 지구는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고 귀한 세상이다. 지구는 이 시점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유일한 생명의 보금자리이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을 헤쳐 우주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코스모스의 물질이 생명을 얻어 숨을 쉬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곳은 이곳 이외에도 아직 찾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확실히 물질이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곳이다.
돌이켜 보건대 인류는 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잠시 지구라 불리는 세계에 몸을 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원초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감히 그 기나긴 여정의 첫날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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