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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반진반 Nov 12. 2023

글은 케이블이 아니라 마감이 씁니다

1990년.


고등학교라는 곳에 들어가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7시 50분까지 등교를 해야 하는데 교문 앞에서는 선생님들이 ‘등교 지도’라는 것을 했다. 명찰을 안 달았다고, 앞머리가 5cm를 넘겼다고(머리에 30cm 자를 대고 측정했다), 색깔 있는 속옷을 입었다고(교문 앞에서 실제로 속옷 검사를 했다), 줄줄이 ‘빠따’를 맞았다. 물론 7시 50분 정각에 교문은 닫혔고 그 뒤에 들어오는 애들도 빠따였지. 아비규환도 그런 아비규환이 없었다.


더 참기 힘든 건 ‘주초고사’라는 걸 친다는 점이었다. 보통 학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본다. 그런데 이놈에 학교는 매주 월요일 시험을 친다는 거다. 이번주 월요일 국어, 다음 주 영어, 그다음 주 수학, 다시 국어, 영어, 수학. 이렇게 뺑뺑이를 돌린다. 대신 중간 기말고사는 국영수 말고 다른 과목만 친다.


중간 기말고사 때 벼락치기하지 말고 평소에 공부하라는 거라고 선생님들은 선심쓰는 것처럼 얘기했다. 매주 주초고사를 치면 주말이 사라진다. 학생들이 주말에 노는 꼴을 절대 보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이건 너무 가학적인 거 아닌가.


뭐 어쩌겠나. 학생이 무슨 힘이 있나. 선생이 까라면 까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어린아이들이 평소에 공부를 할 수는 없지 않나. 평소에 놀고 주말에 공부하는 괴상한 사이클에 적응을 해야 했다.


당시는 토요일에도 4교시 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치고 애들이랑 라면이라도 먹고 집에 오면 슬슬 부담감이 밀려든다. 평일에는 당연히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토요일 일요일에 벼락을 쳐야 한다.


책상에 앉아 본다. 더럽다. 책상 위에 늘어놓은 잡동사니를 치우고 책꽂이도 정리한다. 정리를 하다 보니 서랍도 어지럽다. 서랍을 뒤집어서 볼펜과 스테이플러와 클립 상자를 정확하게 줄을 세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깨끗하다.


책을 꺼내려고 하니 오줌이 마렵다. 작은 일을 보러 갔지만 큰일까지 모두 처리했다. 나오다 보니 입이 찝찝하다. 평소에는 잘 닦지도 않는 이빨을 깨끗하게 닦는다. 순간 샤워도 하고 싶었지만 졸릴 것 같아서 참는다. 다시 책상에 앉는다. 목이 마르다. 컵에 물을 한가득 떠서 앉는다.


계획을 세워 본다. 수학 시험 범위가 챕터가 네 개다. 남은 시간은 36시간. 잠을 4시간씩 빼면 28시간. 밥 먹는 시간 2시간 빼면 26시간. 한 챕터에 6시간씩 잡고 두 시간이나 남는다. 아이고. 여유가 있구나.


오늘은 토요일 야구 중계다. 두산 베어스의 중요한 경기가 있다. MBC에서 중계를 한다고 했는데. 두 시간 남으니까 야구를 볼까. 봐도 될까. 봐야겠다. 야구를 봐야지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겠다.


야구를 본다. 오늘따라 경기가 팽팽하다. 혼자 중계를 보다가 혼자 내기를 한다. 두산이 이기면 나는 월요일 수학시험을 잘 칠 수 있을 거다. 두산이 지면 시험을 망칠 거다. 열심히 응원을 한다. 두산이 졌다.


갑자기 공부하는 일이 허탈해진다. 두산이 졌으니 어차피 시험을 망칠 건데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가. (사실 아직 책을 펴지도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침울하다. 부모님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애가 피곤하다고 생각하신다.


다시 책상에 앉는다. 이번엔 졸리다. 잠깐 자고 일어나서 공부를 하면 훨씬 집중력이 높아지겠지. 책상에 엎드려서 잔다. 10분쯤 자는데 팔이 저리다. 내가 왜 책상에서 이렇게 비참하게 잠을 자야 하나. 이불을 깔고 잔다.


이렇게 주말 동안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나는 결국 월요일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잘 치든 못 치든 시험을 쳤다.


2023년.


소설을 써야지. 다음 주까지 5챕터를 써야 한다. 주초고사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압박이다. 책상에 앉는다. 이번 챕터에서 주인공은 범인이 누구인지 단서를 발견해야 한다. 어떤 단서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발견하는 게 재미가 있을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성거려 본다. 그런다고 금방 떠오르면 내가 천재지. 그간에 했던 메모들을 다시 읽어본다. 별 볼 일 없다. 밥이나 먹을까. 잠깐 쉬면서 생각을 해보자.


넷플릭스에 요즘 뭐가 나왔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나한테도 아침이 올까? 캐릭터 연구를 위해서 한 편만 볼까? 박보영이네? 와 여전히 이쁘다. 이런 간호사가 있으면 병원에서 살고 싶겠다. 간호사 박보영이 연애하는 내용인가?


밥을 먹으니까 소화가 잘 안 되네. 쉬자. 올 워크 노 플레이 메익스 잭 어 덜 보이. 성문 기본 영어는 언제나 진리다. 하나만 더 볼까. 어라. 이게 왜 이렇게 재밌지. 그래 이야기는 이렇게 쓰는 거야.


나는 지금 노는 게 아니다. 일을 하는 거다. 하나만 더 볼까? 왜 이렇게 슬프지? 눈물이 줄줄 흐른다. 호르몬이 문제가 있나? 다섯 챕터를 쓰는 건 어렵지만 남이 만들어 놓은 드라마 12개를 보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오늘도 이렇게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 시간은 벌써 밤 11시 50분. 일요일 연재라고 걸어 놓아서 10분을 남겨 놓고 올린다.


너무 슬퍼하지 말자. 글은 내가 쓰는 게 아니다. 마감이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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