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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로 Mar 29. 2020

나도 일기 한번 써 볼까

일기를 쓴다는 것은 검은 글씨로 인쇄된 일상에 형광펜을 긋는 일이다

어릴 적 나는 받아쓰기 시험을 치를 때마다 눈을 빛내는 아이였다. 어떤 단어가 나오든 자신 있었다. 몸치인 탓에 체육 시간이면 구석에 숨기 바빴고, 공부를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닐곱 살 어린아이가 돈다발을 휘날리며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라고 해서 가능한 건 아니지만) 내게 있어 받아쓰기 시험은 자존감을 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늘 100점을 받다가 딱 한 번 90점을 받았다. 집에 돌아간 나는 서럽게 울며 일기를 썼다. 가족들은 그런 나를 전혀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날 틀린 단어를 아직도 기억한다. '할아버지'였다.


일기 쓰기 숙제도 싫지 않았다. 일기를 왜 남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라며 투덜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일기장을 펼친 다음, 그날 일어난 일들을 체에 내려 선생님께 보여선 안 되는 내용을 거른다. 체 바깥에 흩어진 것만으로도 일기장 한 장은 너끈히 채울 수 있었다. 어떤 경험이든 어떤 감정이든 '처음' 겪는 것이라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충효일기'라는 걸 썼다. 말하자면 그림일기의 '상위 호환'인데, 큼직한 칸마다 글자를 하나씩 집어넣다 보면 한 장이 금방 찼다. 일기를 써서 제출하면 선생님은 다른 색 볼펜으로 뭐라고 한 마디씩 써서 돌려줬다. 내 일기장 속 선생님은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이 되자 일기를 쓰라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나마 '글 같은 글'을 쓸 줄 알게 되니까 쓸데없는 일 말고 공부나 하란다.


하지 말라는 일은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건지.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을 쪼개 하드커버 스프링 노트를 샀다. 금방 첫 문장이 떠올랐다. 더 이상 남들에게 보일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요즘 환청이 자주 들려온다. 환청이라고는 하지만 소리라기보다는 문자열에 가깝다. 멍하니 있으면 환청이 휙하고 날아와 머리에 푹 꽂힌다.


그렇게 한 장씩 채운 일기장이 열 권이 되었다.


열 권의 일기장.



일기장에 쓰고 모으는 것들


일기 쓰기를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내 '일기장 콜렉션'을 보여주며 일기 쓰기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이 '일기를 쓸 만큼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사실 나야말로 세간의 시선에서 봤을 때 '무슨 낙으로 사는지 알 수 없는 인도어(Indoor)파'다. 낯을 많이 가려 만나던 사람만 만난다. (심지어 나서서 약속을 잡는 타입도 아니다) 일상 속 가장 큰 도전은 편의점에 새로 나온 음료수를 마셔 보는 것. 4년간 잡지 기자로서 일했지만 연예인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취미는 뜨개질하면서 영상 보기, 아니 '영상 틀어 놓고 뜨개질하기'가 정확하려나. 뜨개질을 하지 않을 때는 책을 읽는다. 최근 커피와 위스키에 빠져 있지만 맛을 표현할 때마다 어휘력의 한계를 느낀다.


이런 나라도 매일 반 페이지는 일기장에 쓸 만한 일이 꾸준히 생긴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검은 글씨로 인쇄된 일상에 색색의 형광펜을 긋는 일이다. 눈길 한번 주고 지나칠 수 있는 일에 화사한 색을 입혀 언제든 다시 들춰 볼 수 있게 만든다. 특별한 일이 생겨서 일기를 쓰는 게 아니다. 일기를 써서 특별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기장에 무엇을 쓰고 있을까.


1) 오늘 있었던 일

그야 '일기'니까. 입학이나 졸업, 시험, 취업 등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 회사 앞에 새로 생긴 카페를 갔는데 분위기와 커피 맛이 마음에 들어 자주 가게 될 것 같다거나, 어제 세탁한 옷에 음료를 쏟았다거나. 별 거 아니라도 좋다. SNS에서처럼 결점을 감추고 장점을 과장할 필요도 없다. 다시 읽어 보면 공치사보다도 소소한 실수 쪽이 훨씬 재밌으니까.


2) 생각

위 항목과 연결된다. 회사에서 상사와 의견 충돌이 있었다. 상사와 나눈 대화, 당시 분위기 등을 있는 그대로 옮길 수도 있지만 일기를 쓰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 실마리를 잡고 한 문장씩 풀어 가다 보면 내면 깊은 곳의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3) 감상

학생 때는 독후감도 일기장에 남겼다. 그러다 보니 읽은 책의 일부를 인용할 때마다 일기장을 뒤져야 했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지금은 서평을 노션(Notion)과 노트에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기장에 적을 게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영화, 드라마, 만화부터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에 새로 올라온 영상까지. 인사이트를 주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반주로 즐긴 싱글 몰트 위스키 한 잔, 새로 개봉한 원두의 향, 접한 적 없는 뜨개실의 촉감까지 모든 게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왼쪽부터 뜨개실 라벨과 원두 포장지, 원두 보증서.


4) 영수증, 라벨, 스티커 등

곰손인 탓에 일기장에 그림을 그린다거나 빈티지한 스티커를 멋스럽게 붙이는 건 꿈도 못 꾼다. 그렇다고 글만 줄줄 써 내려가다 보면 나중에 일기를 다시 읽을 때 일기와 일기 간 경계가 모호해진다. 물론 날짜를 기입하지만, 날짜만 보고는 당시 있었던 일이 팍 떠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로고가 독특한 가게의 영수증이나 영화 티켓, 비행기 및 기차표, 예쁜 과자 봉투, 카페에서 받은 스티커나 명함 등을 빈 공간에 붙이면 일기장을 훌렁훌렁 넘기더라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예전에 종이 신문을 구독할 때는 신간 기사나 흥미로운 뉴스를 스크랩하기도 했다. K군으로부터 처음으로 꽃다발을 받았을 때는 꽃잎을 떼어 말린 뒤 책갈피에 끼워 뒀다.


풀보다 양면 테이프.


5) 꿈

예전보다는 그 빈도가 줄었지만, 아직도 보름에 한 번 꼴로 꿈을 꾼다. (정확히는 '꾼 꿈을 기억'하는 거지만) 꿈을 분석한다고 해서 내 무의식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꿈에 나타나는 배경과 행동 양식은 분명 깨어 있을 때는 떠올리기 힘든 것들이다.



일기가 가져다준 것들


일기를 써서 무엇이 나아졌을까. 인생의 절반 동안 일기를 써 왔고, '일기를 쓰지 않은 나'를 비교 대상에 놓을 수 없는 나로서는 정량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문제다. 하지만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일기 쓰기의 장점을 두 가지 정도 꼽을 수 있다.


우선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인지, 잊을 만하면 찾아와서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바람인지를 알 수 있다.


심각하게 고민을 써 내려간 페이지들은 다시 열어보면 열이면 아홉은 가벼워져 있다. 지치고 힘든 어떤 날 예전에 쓴 일기들을 읽으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위로를 해온다. (김규림, <아무튼, 문구>, pp.20~21)


일기장에 힘든 일을 쓸 때만 해도 그 일이 영영 나를 괴롭힐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움을 형용하는 단어는 적어지고, 나중에는 일 자체를 언급하는 빈도 또한 줄어든다. 일기장을 찬찬히 읽다 보면 반복되는 시련에 몸을 더 단단히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히 비슷한 유형의 어려움을 마주했을 때 '이 정도는 금방 이겨낼 수 있었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장점은 구사하는 단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서점가는 '에세이의 홍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세이는 더 이상 문필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들이 궁금해 하는 환경이나 직업을 갖고 있거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그만큼 '쉽게 읽히는 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기사 쓰기 수업에서 배운 내용 중 하나가 중학생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쓰라는 것이었다. (전문지에서는 힘들겠지만) 글을 읽는 동안 사전을 몇 번이나 뒤져야 한다면 글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힘들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곧 쓰던 단어만 쓰라는 건 아니다. 생소한 단어라도 내 의도를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상황에 맞는 합성어나 축약어를 만드는 것도 글을 돋보이게 하는 방법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런 낯선 단어들을 자유롭게 써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장'이 바로 일기다.



일기에도 목적이 있다


일기 쓰는 습관을 유지하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팁. 가장 중요한 건 '일기 쓰기'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지만, 일기를 쓰기로 다짐하고 무작정 노트와 눈싸움을 한다고 해서 없던 즐거움이 생기는 건 아니다.


우선 '내가 일기를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릴 적 쓰던 일기에는 목적이 있었다.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 쓰려는 일기는 다르다. 안 쓴다고 해서 야단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냐며 핀잔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저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너무 두루뭉술하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일기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동영상 플랫폼에 업로드하지 않더라도 영상을 남기는 것도 괜찮다. 먼슬리-위클리-데일리 구성의 다이어리에 그날 있었던 일을 간략히 메모하는 방법도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생각을 정리해서 글 형태로 만들어 내고 싶다.'

'10년, 20년 뒤에 내 일기장이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다.'

'문장력을 기르고 싶다.'


꼭 목적에 맞는 일기만 쓸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제약이 있는 게 좋다. 일기를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싶다면 가게나 상표명, 유행 등을 가감 없이 표현할 것이며,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 일기를 쓰는 사람은 평소 말하고 쓸 때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다채롭게 쓰도록 의도할 것이다.



장비병이 뭐가 나빠


앞서 이야기했지만 뜨개질은 내 수많은 취미 중 하나다. 지금까지는 천 원짜리 대바늘로 목도리나 바텀업 방식의 의류를 뜨는 정도였지만, 탑다운 니팅에 도전하면서 큰맘 먹고 10만 원대 조립식 대바늘 세트를 질렀다. 몇 달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사고 보니 '뜨개질은 장비빨'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직 루프를 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바늘이 부드러워 실이 걸리고 빠질 때의 느낌이 좋다.


장비병에는 죄가 없다. 내가 하려는 일에 확신만 있다면 질 낮은 장비를 전전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좋은 장비를 갖추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으니 환경친화적이기도 하고.


일기장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집 정리를 하다가 처음 몇 장만 쓰고 버린 공책을 무더기로 발견하는 것 말이다. 일기 습관을 들이기로 결심했다면 자주 쓰는 필기구나 글 쓰는 습관 등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기고 일기장을 꼼꼼히 골라 보자. 일기, 그리고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한 애정이 샘솟을 것이다.


로디아 라마 하드커버 웹노트 A5. 우리나라에는 아홉 가지 색상만 수입되었다.


현재 사용 중인 일기장은 로디아 라마 하드커버 웹노트 A5(라인)이다. 사실 이 노트에 정착하기까지 고민이 꽤 많았다.


     180도 펼쳐질 것 - 양면 모두 사용할 예정이라면 스프링 노트는 추천하지 않는다.

     하드커버 - 권당 1년은 너끈히 쓰다 보니 내구성은 중요한 문제다.

     종이 질 - 만년필을 사용하다 보니 뒷장 비침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글씨 번짐만은(...)

     포켓 - 종종 영수증이나 예쁜 라벨, 스티커가 너무 많이 생겨 일기 쓰는 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일기장에 달린 포켓에 모아 뒀다가 쓸 내용이 없을 때 빈 공간을 채운다.


'좋은 일기장의 조건'은 사람마다 다르다. 밖에서도 일기를 쓸 생각이라면 무게가 가벼워야 할 것이고, 영화 팸플릿 등을 스크랩하고 싶다면 6공 다이어리도 좋은 선택이다.



'오늘'에 얽매이지 말자


이건 일기장에 써야 해, 라는 생각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았지만 도무지 펜이 나아가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일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사실을 둘러싼 내 생각을 문자의 나열이라는 형태로 직시하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치만 일기니까 오늘 있었던 일을 써야 해.' 내키지 않지만 일기장을 채우기 위해 힘든 걸 꾹꾹 눌러 참으며 어떻게든 써 나가야 하는 걸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기를 통해 가슴 속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고 일의 전말을 차분하게 돌아보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하지만 고통스러워 하면서까지 '오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시간과 일상에 치여 끝이 뭉툭해진 연필로만 그릴 수 있는 선도 있는 법이니까.


꼭 매일 쓰지 않아도 좋다. 분량 역시 얼마나 쓰든 자유다. 직접 고른 공책을 책상 위, 혹은 책장 잘 보이는 칸에 꽂아두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떠올린다면, 언제 돌아오든 일기장은 당신을 반갑게 맞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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