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메모법'이 있다
"학생 때 공부 잘했죠?"
자취방을 구하던 중이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공인중개사를 올려다 봤다. 그는 웃으며 내 휴대폰을 가리켰다.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나는 매물로 나온 방을 둘러볼 때마다 가격이나 채광, 옵션, 입지 등을 묻고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메모 어플에 방에 대한 정보와 내 감상을 정리했다.
"아뇨, 이렇게 적어 두지 않으면 금방 까먹어서요."
과장이 아니다.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다. 잡지사 기자로 일할 때는 취재원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전시회나 세미나 현장에서 진땀을 흘리기 일쑤였다. 다행히 눈치가 빨라서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지만.
다음으로 외우기 힘든 것은 바로 '숫자'다. 네 자리만 되어도 책상을 더듬어 종이와 펜을 찾는다. 휴대폰이 없는 상황에서 걸 수 있는 전화번호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자연히 어릴 적부터 '일단 적고 보자'는 버릇이 들었다. 간밤에 꾼 꿈을 일기장에 쓰고, 전화가 오면 메모지와 볼펜을 챙기고, 회의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순전히 손으로 한 공부였다.
말하자면 내게 있어 기록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들 하는 만큼이라도 따라잡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메모 습관 덕분에 나는 어딜 가든 마감을 잘 지키고 시간 관리에 능숙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마감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지금 하는 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당연한 일+α'가 필요하다.
'기록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문이다.
개선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현상 파악'이다. 기록을 위해 사용 중인 노트와 앱을 꼽아 보기로 했다.
탁상 달력 - 이벤트, 식료품의 유통기한, 다 읽은 책 표시
불렛 저널 - 먼슬리 로그, 데일리 로그, 트래커 등
일기장 - 매일의 단상 기록, 영수증이나 티켓 수집
독서노트 - 책 내용 요약, 인용, 감상 및 질문
클립 보드 & 6공 파일 - 메모, 도표 작성 등
에버노트 - 웹 문서 클리핑, 긴 글 작성
그나마 회사를 그만두면서 업무노트를 쓸 필요가 없어져서 이 정도다(...)
시작은 일기장이었다. 일정 관리부터 아이디어 메모, 서평 기록, 기사 스크랩까지 일기장 한 권이면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기장 속 서평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짧은 글과 쪽지, 영수증 사이에서 필요한 서평을 찾기 위해서는 책장을 한 장씩 넘겨가며 뒤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아날로그 기록과 디지털 색인 간 연동이 가능하지만, 당시는 스마트폰 시대가 아니었고 컴퓨터 한 번 쓰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이후 아이디어 메모는 연습장으로, 할 일 관리는 불렛 저널로, 웹 문서 클리핑은 에버노트로 각자 '제 자리'를 찾아 일기장을 빠져나갔다.
'잘 된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뜨거운 커피는 머그컵에, 맥주는 투명한 유리잔에. 용도에 따른 분류는 손쉬우면서도 실패하는 법이 없다. 1 더하기 1이 2를 보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관리가 힘들다. '장비병'에 걸린 이들이 취미를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에 비싼 장비를 지른다면, '노트병'에 걸린 이들은 새롭게 노트를 장만함으로써 취미의 시작을 알린다. 사실 내 얘기다(...) 소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새 노트를 사서 정리하고, 악기에 흥미를 가지면 새 노트에 '연습일지'라는 라벨을 붙이는 식이다.
이렇게 노트 종류가 늘어나면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든 즉각 대응이 가능할 것만 같다.
하지만 노트가 많아진다고 해서 사각지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벤트는 탁상 달력에, 브런치 글 업데이트 예정일 관리는 불렛저널에, 책 <수치심 권하는 사회> 감상은 독서노트에…… 어, <수치심 권하는 사회>와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연결해서 '수치심 회복탄력성 높이는 불편한 진실'을 주제로 글을 써 봐야지. 그런데 이 아이디어는 어디로 가면 좋을까?
또한 외출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어떤 노트를 챙겨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습장 역할을 하는 클립 보드(A5 용지를 끼워뒀다가 다 쓰면 구멍을 뚫어 6공 파일에 갈무리한다) 하나면 충분하긴 하지만 독서노트처럼 '전용 노트'가 따로 있는 경우 일을 두 번 해야 한다. 결국 책을 읽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일기장에 들어가거나, 할 일 목록이 연습장에 적힌 채 잊히는 일이 벌어진다.
두 번째로는 성과가 쌓이지 않는다. 메모 습관을 유지하면서 가장 뿌듯할 때는 언제일까. 별 생각 없이 끄적인 메모들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 근사한 아이디어로 재탄생하는 것도 좋지만, 한 권의 노트를 다 쓰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만큼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울 때도 없을 것이다. 내가 15년 가까이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었던 것도 일기장이 한권 한권 쌓여 가는 걸 지켜보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모가 분산되면 성과가 쌓이기 힘들다. 다들 한 번쯤 있지 않나. 대청소를 하다 보면 처음 몇 페이지만 쓰다 내팽개친 노트가 우르르 나오는 경험.
마지막으로는 메모 간에 화학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메모 습관의 힘>의 저자인 신정철 작가는 '메모를 기억의 보조 장치로만 쓰는 것은 메모가 가진 힘의 일부만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참 전에 읽은 책 내용과 업무의 일환으로 수강한 세미나, 간밤에 꾼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끄적인 메모……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이들이 서로 부딪혀 스파크를 일으키면 그것은 다른 어느 누구도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나만의 인사이트가 된다.
창의성의 본질은 서로 다른 생각을 충돌시켜 새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신정철, <메모 습관의 힘>, 토네이도, 2015)
하지만 메모를 각기 다른 그릇에 담으면 메모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트는 쌓여 가지만, 이는 양적인 면에서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
불렛저널을 쓰기 시작한 지 딱 1년이 되었다. 지독한 곰손인 탓에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인 단출한 불렛저널이지만, 덕분에 작은 일부터 차근히 해치워 나가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렛저널만이 진리다'라며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생각은 없다.
체계적인 일정 관리가 필요하다면 프랭클린 플래너를, 휴대폰 알림 기능을 이용하려면 분더리스트를 비롯한 일정 관리 앱을, 팀원과 일정을 공유해야 한다면 구글 캘린더를 사용하면 된다.
이처럼 '효율적인 메모법'은 그 사람의 직종, 관심사, 습관, 목표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 메모 습관을 통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해서 무조건 그의 메모법을 따를 필요는 없다.
다음 편부터는 기록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메모를 위한 다양한 툴을 소개하고 메모 습관을 꾸준히 이어 가기 위한 방법을 이야기하려 한다. 메모 습관이 좋은 건 알겠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이들, 지금 내 상황에 걸맞은 메모법을 고민 중인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메모 습관을 돌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