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21)
정부가 1986년 하계아시안게임 서울유치를 결정했다. 희망을 미끼로 국민단합을 기대하였으나,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불만이 표출되었다. 대형 사고나 재해가 발생하기 전 반드시 나타난다는 사건과 징후들이 많았지만 하인리히법칙을 간파한 현자는 출현하지 않았다.
국가사법권력의 두 축인 검경은 공권력집행핵심이라는 수사권독립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검찰이 경찰수사권독립주장을 반박하는 ‘경찰대화자료의 허위성’이란 유인물을 내자, 국무총리가 나서 수사권독립을 둘러싼 검경 간 마찰을 자제시켰다.
노동계에서는 금융, 화학, 철강, 전자, 제과, 중공업 등 거의 모든 산업분야노조들이 임금인상 및 퇴직금제, 노동 3권 보장, 근로복지시설개선 등을 요구하며 농성하였고, 해고노동자가 구속되었다.
강원도정선 사북동원탄좌소속광부 7백여 명이 탄광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대치한 사북사건이 발생했다. 임금인상과 어용노조퇴진을 촉구하였다. 사북사태대책본부가 광부대표 측과 노조집행부총사퇴, 상여금 연 400% 인상 등 11개 항에 합의했다. 피해규모가 사망자 1명, 부상자 1백여 명, 건물파괴 1백여 채라고 밝혔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동 3권 규제로 노조가 제 역할을 못해 사북사태가 발생하였다며, 노동질서회복을 주장하고 국가보위법상 노동기본권제한조항 시행유보를 요구했다. 노동청장이 수용하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였다.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이 창립되고, 전국섬유노동조합서통지부가 결성됐다.
한국노총 금속노조산하 25개 지부조합원들이 어용노조집행부규탄과 해고자복직을 이유로 농성하는 가운데 ‘금속노조 민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 11개 시도에서 '노동기본권확보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보사부장관이 노사분규에 전 행정력을 동원하라고 노동청에 지시하였다.
정치계는 신군부의 권력장악으로 요동쳤다. 김재규 등 내란음모방조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에 송치된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항소를 포기해 징역 7년에 확정되었다. 최규하대통령이 승진한 육군중장전두환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서리로 겸직발령했다. 김영삼신민당총재가 ‘계엄해제, 임시국회 즉각 소집, 정부주도개헌작업중지’를 요구하며, 신민당소속의원 66명 명의로 '비상계엄해제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재야와 대학가에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서울의 봄’이라 명명하고,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맞섰다. 대학생들이 3월 개학에 맞춰 교내에서 본격적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민주헌법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건국대충주캠퍼스에 이어 한양대안산캠퍼스가 개교하였다. 서울대단과대학생회대표들이 학원민주화를 결의했다. 연세대총학생회와 서울대총학생회가 6년 만에 부활하였다.
대학생들이 ‘학원 민주화와 자율화, 재단학원분리 및 어용교수퇴진, 병영집체훈련 거부’등을 요구했다. 동덕여대생 4백여 명과 명지대생 1백여 명이 철야농성을 하자, 문교부장관이 학원사태 관련 담화를 발표하였다.
전남광주조선대생 2천여 명이 ‘학원의 민주화와 정상화를 위한 선언문’을 낭독하고 연좌농성했다. 건국대, 경기대, 국민대, 서강대, 서울대, 서일공전, 성균관대, 세종대, 한국체대, 항공대, 홍익대 등 참여대학들이 계속 늘었다. 경희대 등 전국 14개 대학생들은 ‘어용교수퇴진 및 학원자율화’등으로 시위하였고, 서울지역 9개대 학생대표들이 ‘학원사태에 대한 공동성명’을 공표했다. 경희대생 5백여 명이 단식농성도중 총장사퇴요구 등을 담은 ‘경희인의 백서’를 배포하였으며, 유도대생 3백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서울대생 2천여 명이 ‘4월 혁명 기념제 및 고 김상진열사장례식’을 거행하고 대통령특별담화에 대한 항의집회를 열었다.
서울대교수협이 ‘족벌학원경영자사퇴와 군사교육개선, 교수 재임용철폐, 교수협의회결성’을 결의했으나, 한양대 측은 교직원을 사칭한 운동부원 40여 명을 동원해 농성학생들을 폭행하였다. 한양대생 1,500여 명이 농성학생폭행사건에 대한 총장해명을 요구하며 총장실에서 농성했다. 서울지역 14개대 교수 361명이 학원민주화촉구성명에 이어, 서울대학장회의는 ‘현군사교육제도 조속개혁’을 당국에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민당이 '학원사태조사단'을 구성했다. 문교부는 최근 학원사태 관련자료에서 휴교 19개교, 철야농성 24개교, 어용교수퇴진요구 24개교, 시설확충요구 11개교, 학원자율요구 20개교로 잠정 집계하였다.
정부가 대학군사교육을 종전 주 4시간에서 2시간으로, 대상학년도 2학년까지로 축소시킨다고 밝혔다.
5월에 접어들어 미온적인 정부태도와 신군부의 정권장악의지를 규탄하며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뛰쳐나왔다. 서울대생들이 ‘민주화대행진’을 거행했다. 고려대생 1천여 명은 ‘계엄철폐 및 유신잔당척결, 정치일정단축’을 촉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전북대, 경북대, 전남대, 조선대로 시위지역도 광범위하게 넓어졌다. 서울대생 1만여 명이 ‘계엄해제 및 이원집정부제구상철회’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시위인원도 점차 증가되었다.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도 ‘학원민주화 및 비상계엄해제’를 주장하는 성명을 통해 동참하였다. 이화여대총학은 5월을 ‘이화 민주투쟁의 달’로 결정하고 계엄철폐를 촉구했다. 한신대생들이 계엄해제 등을 담은 시국선언문발표 후 농성에 들어갔으며, 한국외대생들은 '민주화촉진대회'를 개최하였다. 숭전대생들도 성명을 냈고, 연세대총학은 비상학생총회를 진행했다. 전북대생 3천여 명이 가두시위를 하였고, 동국대생들은 '민주화를 위한 학원대회'를 열었다.
마침내 대학생들이 ‘학원민주화와 계엄철폐’를 촉구하며 연합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홍대생 1천여 명이 ‘범민주화촉진대회’에 참여했고, 한외대생 8백여 명이 야간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중앙대 등 각 대학생들이 참여하여 거의 매일 시위가 이어졌다. 건국대와 인하대, 단국대생을 포함한 전국 각지 대학생들의 '시국성토대회'도 연이었다. 서울지역 대학신문들이 ‘시국에 대한 대학신문결의’를 채택했다. 중앙대총학이 ‘5.8 선언문’을 알렸다. 이외에도 숙명여대와 한양대생들이 횃불시위를, 이화여대생이 연좌시위를, 서울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까지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전국 23개대 총학생회장이 계엄해제요구 등을 담은 성명을 포고하고, 서울지역 6개 대학생들이 세종로일대에서 가두시위에 나섰다.
어지러운 시국을 지켜보던 교수들도 속속 동참하였다. 외대교수들이 ‘현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을, 중앙대와 숙명여대, 연세대와 동국대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고려대교수 236명이 교수협의회를 발족하였고, 한신대대학원생들도 나서 ‘민주화운동에 즈음한 우리의 결의’를 다짐했다.
문교부장관이 학생들에게 자숙을 당부하며 야간시위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지만, 지식인 130여 명이 시국선언문을 공표하였다. 전국 27개대 총학생회장단이 ‘시국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하고, 서울지역 21개 및 지방 11개 대학 수십만 명이 ‘계엄철폐’를 구호로 자정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국무총리가 나서 자제를 호소하며 법질서파괴행위가 지속되면 방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0만 명이 넘는 서울지역 35개 대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역에 모여 ‘계엄철폐와 민주화일정제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시위지도부가 정부와 충돌하면 군이 개입할 빌미를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하나로 응집된 집회에 찬물을 끼얹고 해산시켜 버렸다. 이른바 ‘서울역회군’이 발생하였다.
5월 16일, 전국 55개대 총학생회장단 95명이 수습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를 개최했다.
마라톤회의는 5월 17일 오후까지 이어졌다. ‘5월 22일까지 비상계엄해제와 연내정권이양을 위한 정치일정 조속한천명’등을 요구하고, 관철되지 않으면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신군부가 비상계엄확대직전인 17:30분경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급습했다. 대학생지도부를 토끼몰이식 체포작전으로 일망타진하여 전국 55개대 총학생회장 95명을 연행했다.
기자협회가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겠다는 각오로 ‘계엄당국 보도검열반대 결의문 및 행동지침’을 채택하였으나, 신군부에 의해 무력화되어 진실된 언론보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신군부의 검열을 받고 보도된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국무회의는 5월 18일 0시를 기하여,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비상계엄지역을 확대키로 의결했다
일촉즉발위기상황으로 치닫는 대한민국현실이 중학교3학년 문승협의 피부에는 와닿지 않았다. 문승협은 무료한 주말을 보내면서도 언론보도차단 등으로 시국소식에 깜깜하였다. 설사 안다손 치더라도 당장 중학교3학년일상생활과 무관하고 큰 불편이 없어 무감각하거나 관심밖일이었다. 훗날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작금의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서수연선생이 학교를 떠나고 두 달여 지났지만, 문승협은 실연당한 사람처럼 무기력했다. 서수연선생에 대한 감정을 존경이라고 정의하며 스스로타협을 시도하였으나, 자신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했다. 서수연선생의 그림자도 없는 학교에서 즐거움을 찾기 어려웠다. 못난이형제들과 어울림도 무미건조하였다. 뭔가 활력을 찾으려 애써보아도 따분하기만 학교생활이었다. 맨날 부딪혔던 서수연선생과 추억이 문득문득 떠올라 괴롭히기도 하고 행복하게도 했다. 사춘기에 열병같이 왔다 금세 사라지는 중학교3학년의 여선생짝사랑이라고 무시해도 상관없었다. 서수연선생은 문승협에게 말 그대로 이상향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인생논리는 거짓이 아닌 참이었다. 과거와 멀어져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만큼 점점 생각나거나 생각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또 줄어든 횟수에 비례해 그리움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서수연선생존재가 문승협뇌리에 지나간 시간사이로 꽁꽁 숨어들었다.
5월 18일, 계엄사가 ‘전현직국가원수비방금지, 정치활동중지, 대학휴교’등을 담은 포고령을 선포하였다. 권력형 부정축재혐의자와 시위배후조종혐의자로 김대중 등 26명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미국무부가 계엄령확대를 우려하는 성명을 공개하였다.
그 시각 광주전남대학교정문 앞에는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결의에 따라 대학생 200여 명이 모였다.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무차별로 구타했다. 이에 격분한 전남대생 6백여 명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정문 앞에서 투석 전을 벌였다. 대학생과 계엄군 사이에 충돌이 빚어진 이 사건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불씨가 되었다.
이는 곧 광주시내금남로에서 민주화시위로 이어졌다. 진압하는 계엄군에 분노한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시위대는 갈수록 불어났다. ‘계엄철폐, 김대중석방, 전두환퇴진’등을 요구하며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오후 3시 무렵, 계엄군이 골목까지 쫓아다니며 충정봉으로 학생과 시민들을 마구 때리더니, 강제로 차에 태워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24세 청각장애인 김경철씨가 첫 희생자였다.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충정봉으로 몸과 머리 등을 사정없이 맞았다. 시민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눈에는 애절하게 살려달라는 수화가 허공을 가르는 손짓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벙어리흉내를 낸다는 빌미로 더 무참히 폭행했다.
시민들이 맞으면서도 살기 위하여 도망쳤다.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쓰러진 사람들은 화물차에 던져져 어디론가 실려갔다.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가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계엄군만행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시내곳곳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무차별 살상하는, 설마 했던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흔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곡 소리를 듣고 ‘일본 놈들보다 더해, 6.25 때보다도 잔인한 놈들’이라며 혀를 찼다. 계엄군은 유언비어라고 주장하며 부인하기에 급급하였다.
무력진압은 첫날 시위를 해산시켰지만, 오히려 시민과 학생들 분노를 야기시켜 항쟁으로 촉발시켰다.
5월 19일, 공수부대의 폭력진압을 계기로 광주항쟁이 시내전역에 확산되었다. 대학생과 시민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가세해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었다. 금남로와 계림동, 충정로 등지에서 공수부대와 대치했다. 공수부대가 소총에 칼을 부착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위협하더니, 가톨릭센터와 공용터미널 주변 등 곳곳에서 악랄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면서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공수부대가 간선도로와 주요 시설을 확보하고 시위대를 포위하자, 학생과 시민들이 화염병과 돌로 초보적인 자위적 무장을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무참한 진압에 격렬히 대항하여 학생과 시민들이 돌을 던졌고, 공수부대원이 맞아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시민들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이 더욱 커갔다.
공수부대원들은 신군부의 언론통제로 신문이나 뉴스를 볼 수 없어 시대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광주에 투입되기 직전 상관들의 대의명분과 명령에 세뇌되어 있었다. 광주를 점령한 빨갱이와 좌경분자들로 구성된 반정부반란군을 때려잡으러 간다는 지휘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길가에 서있는 시민들 중에 공수부대진압행위에 격분하여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아무리 상관명령이라도 옳은 일인지 양심에 가책을 느낀 공수부대원도 있었으나, 실제 사람을 패서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장면을 몇 번 본 순간부터는 다들 눈이 뒤집혔다.
실탄까지 장착한 공수부대원들이 도망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빨갱이라고 외치며 충정봉을 휘두르거나 대검으로 찔렀다. 잡혀온 남녀노소 수백 명을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긴 뒤, 넓은 공터에서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온몸이 시커멓게 피멍 들고 죽도록 사정없이 때렸다. 시궁창을 기거나 오리걸음으로 선착순 시켜 그중에서 늦은 사람들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자행하면서도,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다. 마치 사냥하듯 시민들을 쫓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대로 더욱 무자비하게 죽였다. 어떤 공수부대원은 지난밤 몇 놈을 대검으로 통쾌하게 찔렀노라며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광주시내 여기저기 죽어 넘어져 있는 시신이 계속 늘어갔다. 어떤 공수부대원은 ‘전라도 새끼들은 다 죽여야 해’ 라거나, ‘감히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다녀’라고 소리쳤다. 잡혀온 남녀노소민간인들에게 심한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5월 20일 오후, 광주시내중심가에 10만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였다. 택시 200여 대가 일제히 경적을 울려 시위에 가세하였다. 지식인과 노동자, 회사원, 종업원 등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했다. 초기 학생시위가 이미 민중항쟁으로 진전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수부대가 광주역에서 시위대를 향해 M16을 발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시위대대표와 도지사 사이에 협상이 열렸지만 결렬되었다.
이날 밤, 20만 명 규모로 불어난 시위대가 노동청과 신역,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격렬하게 시위했다. 이들은 공수부대의 총칼에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맞섰다. 자정을 전후하여 공수부대가 건물옥상에서 장갑차에 올라탄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신군부가 검열한 언론과 라디오에서는 시민을 가장한 폭도들과 불순분자들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뿐이었다. 어떤 언론에서는 남파간첩과 고정간첩을 거론하며 북한개입설을 제기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하고 차량을 파괴하는 장면만 보도하였다. 방송국과 관공서 등 공공시설이 불탔다는 점을 강조했다. 학생과 시민들의 피해와 계엄군만행은 알리지 않아, 타 지역에서는 광주항쟁에 공감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
문승협은 시청각뉴스가 제한되다 보니 광주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온종일 집에만 틀어박혀있다가 답답해서 저녁 무렵 마실을 나갔다. 때마침 상점에 들른 동네친구 한성철을 만나 집으로 놀러 갔다.
“인사해라, 광주서 고등학교 다니는 사촌형이어.”
“안녕하세요.”
“성철이 친구냐?”
“네.”
“아야 승협아, 너 광주 야그 들었냐?”
“TV에 나오는 거 보니까,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난리라던데?”
“너도 암것도 모르그만. 방송에서 나온 것은 다 거짓갈이어.”
“에이 설마, 방송이 사실과 다르게 보도하겠냐?”
“염병하네, 지금 광주서는 전쟁이여 전쟁.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고, 난리가 아니란께?”
“유언비어 아냐? 방송에서 유언비어라고 믿지 마라던데? 유언비어 퍼트리면 처벌한다더라.”
“성. 더도 덜도 말고, 성이 본 것만 야그해주쑈.”
한성철의 사촌형이 광주동구청 근처에 살면서 직접 목격한 5.18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금남로 등하굣길에서 공수부대원의 만행을 보았다. 이후 휴교가 되면서 수없이 쏟아지는 비참한 증언을 들었다. 희생자를 실어 나르는 리어카를 목격했다. 군중 속에 피 절은 천으로 덮인 희생자들을 보니 분노가 끓었다. 정신 차려보니 시위대와 함께였다. 시위대가 가진 건 보도블록을 깨서 만든 돌멩이와 화염병이 전부인데, 공수부대는 착검한 소총과 기다란 충정봉을 들었다.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충장파출소를 기점으로 서현교회사이 광주천다리를 두고 공방전을 펼쳤다. 밀리면 서현교회, 밀고 가면 충장파출소를 넘어 금남로. 밀고 밀리기를 몇 번, 어느 사이 금남로에 들어섰다. 금남지하상가신축으로 철판 깔린 도로를 넘어서기를 또 수십 번, 금남로 양 옆에는 흡사 무덤처럼 벗겨진 신발들이 군데군데 쌓여있었다. 도로에는 충정봉에 의해 흩뿌려진 핏자국들이 마르지 않은 채 흥건하였다. 핏자국 위로 밀고 밀리는 와중에 전일빌딩까지 진격했다.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다시 밀리면서 빌딩으로 진입한 시민들이 고립되었다. 그 시민들이 나오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생사마저 불투명하였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시신들 목관이 광목천이나 태극기로 덮여 수없이 늘어났다. 그렇게 반복되면서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광주는 고립무원이었으나 결코 지치지 않았다. 그 어디에서도 노략질과 절도는 없었다. 오히려 광주공원에서 불온세력색출도 이뤄졌다. 수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에 지나갔다. 어느 땐 트럭에 몸을 실었다가 시민들이 나눠준 빵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일면식도 없는 형들이 나눠준 과자를 얻어먹었다. 광주와 목포 간 도로는 리어카에 거적을 덮은 시신들이 실려서 지나갔다. 저녁에는 대동고 앞 버스종점에서 날아다니는 총탄불빛을 보았다. 낮에는 옥녀봉능선으로 넘나드는 군용 헬기가 여러 대였다. 백운동로터리에 타버린 트럭잔재도 있었다. 그즈음 공수부대원들이 집으로 찾아가 집안을 온통 들쑤셔 놓았다. 아들이 잡히면 죽을까 두려운 부모들이 속옷을 갈아입으러 온 한성철의 사촌형을 차에 태워 목포로 데려왔다.
한성철의 사촌형은 학생과 시민들 피해상황과 계엄군만행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타 지역에서 심각한 광주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였다. 만약 광주가 공수부대에 의해 고립되면 전멸될 거라고 걱정했다. 문승협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비로소 정부와 언론의 주장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경향신문 등 언론사기자들이 5.18에 대한 왜곡보도에 반발해 제작거부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이 발행을 중단했다. 광주 MBC궁동사옥과 광주세무서가 시위대에 의해 방화되었다.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전원이 최규하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였다. 대법원은 10.26 사태 관련자 김재규 등 5명에 사형, 김계원에 무기징역, 유석술에 징역 3년을 각각 확정했다.
5월 21일 부처님 오신 날, 시위대가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벌이기 위해 나주·영산포·화순 등지 경찰관서에서 카빈총과 M1소총 800여 정, 탄환 5만여 발을 탈취해 시위현장에 반입하였다. 화순탄광광부들 협조로 화약과 뇌관을 확보했다. 방위산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80여 대 대형버스와 장갑차 등을 몰고 나왔다.
학생부터 노동자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시민군이 총과 실탄으로 무장하고 계엄군임시본부인 도청으로 진격하자, 공수부대가 조준사격에 이어 집단발포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난사하였다.
한편 일부시위대는 언론들이 신군부탄압으로 침묵과 왜곡보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광주실상을 알리려고 주변지역으로 빠져나갔다. 항쟁이 전라남도권으로 확산되었다. 오후부터 농민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목포·영암·장성·나주 등으로 진출하였다.
작전상 광주시외곽으로 철수한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고 광주를 고립시켜 봉쇄했다. 이로써 항쟁 나흘 만에 계엄군이 광주시내를 포위하였다. 시민군이 교도소와 도청도경을 제외한 시내전역을 점령했다.
문승협은 어젯밤 한성철의 사촌형에게 들은 광주항쟁상황을 떠올렸다. 혹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였으나, 중학생이 광주항쟁에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 공부나 하자는 마음에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가까워질 때쯤 구름처럼 몰려가는 대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크럼을 짠 많은 인파가 구호를 외치며 유선국민학교 쪽에서 목포경찰서방향으로 행진하였다. 군중 속에 동네친구 한성철과 정아준, 국민학교친구 김철종과 김용남이 눈에 띄었다.
문승협이 대열을 피해 길가에 서서 지켜보다 얼결에 껴들었다. 모르는 사람과 어깨동무했지만, 낯가림이 심함에도 전혀 거리낌 없어 신기했다. 처음 느껴보는 동지의식이었다.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던 시위대가 목포경찰서 앞에서 ‘독재타도 계엄해제’를 외쳤다. 시민군으로 보이는 무장한 사람이 신원불명자와 나이 어린 중고생들은 총기지급불가하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몇몇 사람들이 신원확인 없이 총기를 받겠다며 소란 피웠다. 버스와 트럭을 타고 나타난 시민군본진이 금세 질서를 바로잡았다. 총기지급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대열이 흩어졌다. 누군가 재차 구호를 선창 하자 총기 지급에서 열외 된 시민들이 다시 스크럼을 짰다. 문승협은 김철종과 김용남사이에 끼어 어깨동무를 했다. 시위대행렬이 목포역으로 향하였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참여한 시위대가 목포역광장에 집결해 있는 시민들과 합류했다. 모두 결의에 찬 눈빛으로 연단에선 시위대지도부구호에 따라 목청껏 부르짖었다. 다른 건 몰라도 ‘민주수호 독재타도!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외침에 한마음 한 뜻이었다.
TV에서 봤던 시위대는 ‘계엄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화염병과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둘러 저항하였으나, 문승협이 참여한 시위대는 구호만 유사할 뿐 과격한 행동 없이 너무나 질서 정연했다.
시위대지휘부가 확성기를 통해 간절한 마음으로 이해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우리 시민군이 카빈총으로 무장항쟁을 시작한 것은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함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분자와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은 공수부대가 폭도입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도입니까? 정부당국은 계속 허위날조하여 유포하는 데 혈안입니다.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시커먼 얼굴의 대학생들이 집결한 시민들에게 뭔가를 나눠줬다. 흑백사진인쇄물을 받아 든 시민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방에서 터지는 최루탄가스연기.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고, 부상당한 시민들을 처형하는 장면들.
문승협은 사진을 보니 마치 광주가 도살장 같았다. 유인물을 받아 든 시민들 중에 설마라며 사실인지 되묻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 계엄군만행에 몹쓸 놈들이라는 욕으로 분노를 표출하였다. 문승협은 광주에서 대학 다니는 동네친구 정아준의 큰형에게 유인물을 받았기에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참혹한 사태를 확인한 문승협과 친구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돕자며 의기투합했다. 다 같이 군중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목청껏 따라 외쳤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져 저녁을 먹고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엄마 이항리가 집에 들어온 문승협을 요모조모 살폈다. 옆집 아줌마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딴생각 말고 조신하게 공부나하라며 엄중히 경고했다. 뜨끔한 문승협이 밥 먹으면서 TV를 보았다. 계엄사령부에서 처음으로 공식입장을 밝혔다.
‘광주시일원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는,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악성유언비어유포와 공공시설파괴 등을 통해,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
계엄사령관육군대장이희성이름의 담화문이었다. 광주시민을 일방적 매도하고 진실을 왜곡하였다.
문승협은 사실과 너무 다른 담화문내용에 어이없었다. 권력자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적에게 향해야 할 총구가 국민에게 향했다는 사실에 기가 찼다. 세상물정 모르는 중학생이지만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이항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문승협에게 어디 가는지 물었다. 바람 쐬러 간다고 하자,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들어오라며 야단쳤다. 문승협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친구들과 약속을 지키려는 의연한 자세로 목포역으로 갔다.
목포역광장에 발 디딜 틈 없는 인파가 모여있었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높은 건물옥상에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의 총구를 시위대를 향해 겨누었다. 여기저기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시위대동태를 살폈다.
아주머니들과 여학생들이 소쿠리와 고무대야를 머리에 이고 주먹밥과 먹을 것을 시위대에게 나눠줬다. 광장 앞 연쇄점과 슈퍼의 주인들은 가게 문을 개방하여 무료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배를 채울 수 있는 빵과 우유 외에는 손대지 않았다.
부처님 오신 날이어선 지, 스님과 불자들이 연등을 들고 밝혔다. 연단 주변에 가톨릭신부와 수녀들이 함께하여 신뢰를 실어줬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있을지 모를 부상을 대비했다.
시위대지도부가 확성기를 통해 낮에 알렸던 무장항쟁당위성과 정부태도를 재차 비판하고, 낮에 돌렸던 유인물 대신 영사기를 돌려 목포역사 벽에 비췄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연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들리는 비명과 절규들로 광주시내는 생지옥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와 전혀 상관없이 지나가는 일반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죽인 것은 물론, 부상당한 시민들을 불법으로 처형하였다. 물놀이하던 아이들까지 쏴 죽이고 헬기사격과 강간 등을 자행했다는 내레이션도 있었다. 영상이 끝난 뒤 시를 낭송하였다.
“계엄군은 가짜애국, 광주시민 진짜애국. 계엄군이 진짜폭도, 광주시민 민주의거. 계엄군은 정권강도, 광주시민 민주항쟁. 민주화여, 영원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여, 피와 땀이 아니 곤 거둘 수 없는 거룩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우리는 총칼에 부닥치며 여기 왔노라.”
시낭송이 끝남과 동시에 ‘민주주의 수호하라!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구호를 선창 하자, 시위군중이 따라서 복창했다. 이어 ‘전두환이 물러가라, 훌라 훌라’라는 훌라송을 다 함께 불렀다.
누가 알려준 구호나 노래가 아님에도 시민들이 금세 따라 하였다. 문승협은 처음 듣는 구호와 노래를 능숙하게 따라 하는 자신이 기특했다. 가슴에서 일렁이는 감정에 울컥해 눈물을 글썽였다. 처음 겪는 군중심리였다.
늦은 밤이 되면서 주먹밥을 나눠주었다. 문승협은 누가 만들어 제공하는지 궁금하였으나 물어볼 수 없었다.
문승협과 친구들도 도울 일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어려 보인 탓에 몇 살이냐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어른스러워 보이려 나이가 아닌 중학교3학년이라고 했다. 여기는 어른들에게 맡기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는 말이 꼭 따라붙어 자존심상하였다. 나랏일에 나이가 무슨 의미인지 되묻고 싶었다.
흉흉한 소문을 들은 어머니들이 자정이 되어도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걱정 끝에 목포역으로 찾아 나섰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발견된 순서대로 하나 둘 엄마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날부터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당하였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어려운 국가시국을 운운하며, 어려도 동참해야 한다는 말로 엄마들에게 항명했다. 문승협과 김용남은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정아준과 김철종은 이미 형들이 나섰는데 행여라도 둘 다 잘못되면 어떡하냐는 거친 설득에 불가항력이었다.
5월 22일, 광주항쟁이 목포와 나주 등 인접지역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광주를 장악한 시위대가 치안확보 등 자치활동을 하였다. 공무원, 변호사, 목사, 신부, 기업가 등 15명으로 이루어진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사태수습이전군대투입반대, 연행자전원석방, 군대과잉진압시인, 사후보복금지, 부상자치료와 사망자보상, 요구관철시무장해제’를 결의하여 계엄군과 교섭을 벌였다. 요구사항에 ‘군사정권퇴진, 계엄철폐’등이 포함되지 않아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계엄군도 거부하여 흐지부지됐다.
계엄사가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미국무부는 광주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희망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미국방부가 항공모함‘코럴시호’를 한국근해에 파견한다고 밝혔다.
이때 전혀 보도될 수 없었던 광주민주화운동참상이 독일기자 위르겐힌츠펜터에 의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다. 위험을 감수하며 촬영한 힌츠페터기자의 광주민주항쟁필름이 우여곡절 끝에 22일 도쿄나리타공항에서 출발했다. 서독전역에 방송하는 독일공영방송 ARD소속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8시 뉴스프로그램 ‘타케스샤우’를 통해 즉시 보도되었다.
5월 23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광주시민의 요구수렴보다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하여 분열을 야기시켰다. 광주시민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규탄하고 투쟁목표를 재확인하였다. 천주교광주교구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측 10명, 학생대표 20명이 참여했다. 일부 수습위원의 주장으로 무기 200점을 계엄군에 반납하고, 연행된 시민 33명을 넘겨받았다.
정부가 김대중과 김종필을 포고령위반으로 연행하여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국무총리서리는 광주를 시찰하여 치안부재상태를 우려하며 질서회복을 호소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공수부대가 광주주남마을에서 운행 중인 버스에 총을 난사하여 탑승자 17명을 살해하는 등 시민살상은 계속되었다.
위컴한미연합사령관이 한국정부 측의 군부대 소요진압동원요청에 동의했다.
문승협은 시위소식을 알 수 없어 궁금하였다. 학교에 간다는 핑계로 탈출을 감행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살핀 시내분위기는 분노한 함성으로 들끓던 엊그제 시위양상과 달리 조용하였다. 높은 건물마다 무장한 군인들로 경계병력이 늘었을 뿐 아니라, 군헬기들이 시내중심도로 위를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학교에는 전화로 만나자고 약속한 못난이형제들과 몇몇 친구들이 나와있었다. 공부목적이기보다는 불안한 마음을 달랠 소통이 필요했다. 서로 무사함에 안심하였다. 못난이형제들과 친구들이 경험한 사실들을 앞다퉈 쏟아냈다. 들은 이야기들도 가감 없이 한다며 사건사고를 황망하게 늘어놓았다.
광주목포 간 도로가 차단되었고, 뚫으려는 시민군과 막으려는 공수부대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시민군이 죽었다. 이에 굴하지 않은 시민군이 버스와 트럭으로 저지선을 돌파하려 하자, 탱크부대가 포격하여 전원 사망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었다. 공수부대가 시민을 때리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쐈다는 이야기는 어느새 이야기 축에도 못 들었다. 무안청계지역 우회도로뿐 아니라, 목포에서 외각으로 빠져나가는 모든 도로가 봉쇄돼 밖으로 나갈 수도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한탄하였다.
안광호가 동학농민운동과 6.25 전쟁 당시 학도병을 이야기하며, 우리도 총을 들어야 할 때가 왔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나 선동했다. 이정훈이 빨갱이라고 외치며 저격하듯 손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였다. 친구들이 동시에 때릴 듯이 덤벼들자, 이정훈이 장난이라며 두 손 모아 삭삭 빌었다. 송귀남이 아무리 말이라도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하지 마라며 타박했다. 이정훈은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용서를 빌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황민이 갑자기 서수연선생근황을 이야기하였다.
서수연선생이 5.18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기 며칠 전 광주로 이사 갔고, 곧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혹시 아는지 물었다.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다들 부모에게 단속받아서 저녁식사시간 전까지 집에 가야 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귀가하던 문승협은 서수연선생이 피해는 없는지 생사마저 궁금하였다. 아무쪼록 무사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결혼한다는 말이 불쑥 떠올랐다. 차창밖을 바라보며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길 빌어요’라고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버스에서 내려걸으며 서수연선생소문을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홍지아집 옆을 지나가면서 별일 없는지 궁금하였으나 그냥 집으로 향했다.
5월 24일, 광주항쟁 7일째를 맞이한 어지러운 상황임에도, 신군부가 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한 전중앙정보부장김재규 등 5명을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시민군은 무장해제를 놓고 투항파와 투쟁파로 나뉘었다. 투항파는 무장을 해제하여 지역명망가 중심으로 계엄군과 협상을 추진하자고 했다. 투쟁파가 반대하여 격론 끝에 주도권을 잡았다.
공수부대가 광주송암동에서 무반동포로 군용 트럭에 오인사격하여 광주보병학교교도대 9명이 숨졌다. 동부대장병들이 오인사격분풀이로 전혀 무관한 송암동일대주민들과 가축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5월 25일, 시민군이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동시에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체계적으로 조직하였다. ‘최후 일각 최후 일인까지 반민주세력과 싸울 것’을 결의했다. 그럼으로써 미국 측 압력이나 범국민적 저항으로, 신군부의 집권기도가 좌절되기를 바라며 시간을 벌고자 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광주사태진압을 위해 4개 대대 한국군을 미국통제에서 풀어달라는 신군부요청에 동의한 상태였다. 이미 5월 초 질서유지에 필요하다면 무력사용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정부에 전달했었다.
5월 26일, 광주사태해결을 위한 최규하대통령의 특별담화문에 이어, 문공부장관이 '광주소요사태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내무부가 광주시위로 전남행정기능이 마비되어 본부가 직접 예산지원과 행정지도를 담당키로 결정했다. 안병하전남도경국장을 지휘권포기혐의로 연행할 계획으로 대기발령시켰다. 그리고 오후 6시, 계엄군이 시민군에게 무조건 투항할 것을 최후통첩하였다.
5월 27일, 중무장한 계엄군이 새벽 0시를 기해 탱크 등을 앞세우고 광주화정동을 넘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1시간 교전 끝에 수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새벽 3시 30분,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이른바 ‘충정작전’에 돌입하였다. 전투사단과 공수여단 2만5천여 명이 광주시내로 진입하여 전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은 일방적인 계엄군공세로 대부분 살상되었다. 일부 생존자는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전일빌딩에 있던 시민군 20여 명은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되었다.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사망 17명, 체포 295명, 순직 군인 2명이라고 발표하였다. 활활 타올랐던 광주민주화항쟁촛불이 그렇게 사그라졌다.
광주민주화항쟁은 신군부집권계획에 따른 과잉진압, 유신독재를 관통하여 이어져 온 민주화열망, 박정희정권의 정치목적에 따른 영호남지역감정조장 등이 원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의 진압군동원을 승인했기에 이후 학생민주화운동에서 반미운동은 불가피하였다.
5월 31일, 계엄사가 사망자 170명, 부상자 380명, 체포 1,740명이며, 이중 730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으나, 국민들은 축소은폐를 확신하였다.
신군부는 또 다른 국민탄압을 기획하고 있었다. 바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였다. 약칭 ‘국보위’ 설치는 군인신분이라 국정에 개입할 근거와 권한이 없는 신군부가 주도했다.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함에 있어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국책사항을 심의한다는 명목이었다. 의장이 대통령최규하였지만 바지사장에 불과하고, 실권은 상임위원장전두환이 쥐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국무총리와 각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비서실장, 합참의장, 각 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등 군수뇌부와 대통령이 임명하는 10인 이내의 위원들로 구성되었다. 비록 임시기구지만 신군부인사들을 대거 임명시킴으로써 신군부가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광주민주화운동 후유증으로 서강대생 김의기씨가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배포한 후 기독교회관옥상에서 투신 사망했다. 삼진특수철노동자 김종태씨가 이화여대 앞 4거리에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란 유인물을 뿌리고 분신해 닷새 만에 숨을 거두었다.
계엄사는 언론인 8명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수배하였다. 서울대생 조남일씨 등 4명을 광주항쟁지하신문발행 혐의로 구속했다. 연세대는 시위학생 24명 제적과 63명을 무기정학처분, 고려대는 반정부시위학생 27명에 제적처분을 내렸다.
광주시내 각 국민학교가 휴교 13일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13개 여자고등학교와 25개 남자고등학교가 휴교 26일 만에 등교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곳곳에 남은 상흔으로 괴로움에 시달렸다.
목포는 인접지역이라 고통과 상처는 광주와 비교할 순 없지만, 충격과 분노는 다를 바 없었다. 정상을 찾아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말로써 분출하다, 광주에 미안함으로 애통해하더니, 시간에 의지하여 잊어가는 스스로 치료과정을 밟아갔다.
문승협도 감정이 회복되어 가면서 서수연선생이 걱정되어 수소문하였다. 선을 본 뒤 광주로 이사했다는 사실은 확인하였으나 건강한지 무탈한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고순영선생과 양명기선생을 비롯한 친구였던 인혜여중 강지영선생에게도 도움을 청했지만, 누구도 서수연선생의 신상과 연락처를 몰랐다. 오히려 알아보는 과정에서 결혼하려던 남자가 5.18 항쟁으로 사망하였다거나, 반신불수가 됐다는 흉흉한 소문만 들었다. 답답한 심정에 서수연선생이 살던 집에도 가보았다. 다른 사람들이 살았고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 기억을 더듬어 서수연선생의 아버지가 다녔던 은행에 찾아갔다. 몇 번을 문전박대당한 끝에 광주회사연락처를 받았다. 수없이 다이얼을 돌려도 신호만갈뿐 받지 않았다. 한 달여 계속 시도한 끝에 통화됐을 때는 서수연선생의 아버지가 퇴임하였다는 짤막한 대답만 돌아왔다. 다시 용기 내어 꼭 연락해야 하니 집전화번호를 알려달라며 집요하게 사정했다. 결국 알아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전화하였으나, 그런 사람 없다는 말만 들었다. 염치 불고하고 재차 확인전화했을 때는, 그런 사람 없다는데 왜 자꾸 전화하냐는 쌀쌀한 말로 끊어버렸다.
문승협이 더 이상 방법이 없어 힘들게 고민할 때, 계엄사는 고민하지 않았다. 계엄사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자 26명을 군법회의에 기소하였다.
하지만 김대중구속은 호남지역정서를 신군부반대로 결집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는 박정희집권기간에 심화되어 온 호남의 정치적·경제적 차별, 갑오농민전쟁·광주학생운동 등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의 역사적 경험, 유신체제에 의해 지속적 박해를 받으면서도 반독재운동을 계속해온 김대중이라는 지도자로서의 존재 등,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이 갖는 특수성이 내재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군부가 집권계획에 따라 반정부세력을 제거하려고, 대대적인 사회정화운동을 내세워 사법처벌·숙정·해직·순화교육 등을 예고하였다.
대검이 자체숙정작업을 벌여 검사 8명과 직원 21명을 부조리와 관련해 인사조치했다.
국보위가 공직자숙정계획을 발표하여 전국 3급 이하 행정공무원 4,760명, 은행 보험증권기관 임직원 431명, 정부투자기관 등 산하기관 127개소에서 임직원 1,819명을 사회정화명분으로 숙정하였다.
계엄사가 부정축재·국기문란·시위주동·배후조종 혐의로 전직 장관 3명, 국회의원 14명 등 정치인과 교수, 목사, 언론인, 학생등 329명을 지명수배했다.
신문협은 언론인자율정화결의로 언론인 933명이 해직당하게 되었으며, 동아일보는 지방주재기자 7명을 포함한 기자 33명을 강제해직시켰다.
문화공보부가 ‘창작과 비평’등 정기간행물 172종을 등록취소한데 이어, 전국 2,597개 출판사 중 617개사 등록을 취소하였다.
문교부는 교육공무원 611명을 숙정했고, 각급 학교에 정화위원회구성지시 후 과외와 폭력 등 비리를 일소키로 결정하였다.
국보위가 신원기록일제정리와 연좌제폐지를 결정했다. 폭력·마약·사기·밀수 등 사회악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정화하여 사회개혁을 이룬다는 명분 아래 ‘사회악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마련하였다.
서울시경은 폭력배특별단속에 2,371명을 검거, 2명 군사재판 회부, 251명을 구속송치했다.
계엄사의 삼청계획에 따른 포고령발동은 불량배일제검거라는 겉은 그럴싸하였다. 국민적 기대와 신뢰구축을 명목으로 사회정화작업을 추진했고, 그 일환이 삼청계획뿌리인 ‘삼청교육대’였다.
삼청교육대명칭은 교육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합동작전인 ‘삼청작전’에서 비롯되었다. 법원영장발부 없이 체포되었고, 그중 순화교육대상자로 분류된 자는 군부대 내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
연인원 80만 명의 군·경이 투입된 삼청작전은 국보위 지침상 검거대상인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우려자, 사회풍토문란사범, 사회질서저해사범’등이었다. 피 검거자들은 시·군·구 관할경찰서에서 군·경·검 합심제에 의한 등급심사를 통해 4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은 군사재판 또는 검찰인계,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C급은 순화교육 후 사회복귀, D급은 훈방조치하였다.
국보위가 이틀 만에 폭력배와 전과자 등 16,599명과 사회악사범 30,578명을 검거했다. 이중 19,000여 명을 군부대에서 순화교육하였다. 순화교육대상자 가운데는 학생과 여성도 있었다. 전체 피검자 중 전과사실이 없는 자가 열명 중 네 명에 달해 ‘불량배소탕’이라는 명분과 달리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순화교육은 전후방 26개 부대에서 실시됐다. 기간은 4주간을 원칙으로 죄질 및 개과천선 가능성에 따라 2주간 훈련 후 조기퇴소를 시키기도 했다. 연병장둘레에 헌병을 배치하는 등 엄중한 집총감시에서 진행되었고, 주로 고된 육체훈련으로 이루어졌다.
교육과정에서 구타와 얼차려는 일상이었다. 지시불이행자나 태도불량자는 별도 설치된 특수교육대에서 혹독한 고통을 받았다. 교육대상자들이 순화교육을 마치면 계엄사령부지침에 따라 B급근로봉사자와 C급사회복귀자로 재분류되었다. 미순화자로 분류된 B급은 전방 20개 사단에 수용되어, 근로봉사라는 이름하에 전술도로 보수·진지구축과 보수공사·자재운반·통신선매설등의 작업에 동원하였다. 인권유린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신군부에게 장악된 정치권력은 멈춤 없이 질주했다. 최규하대통령이 전두환국보위상임위원장을 육군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시킨 뒤 대통령직하야특별성명을 냈다. 새지도자는 국민과 군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군부주축의 국방부전군주요지휘관회의는 차기대통령으로 학원내외소요사태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전두환국보위상임위원장을 추대했다. 이에 따라 전두환국이 육군대장으로 전역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전두환국보위상임위원장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전두환은 9월 1일 대통령직에 취임하여 조각을 단행했다. 자욱한 안개가 대한민국을 덮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