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너는 몇 날 몇 시에 어디에서 죽게 될 것이다’ 같은, 이를테면 사주팔자 같은 것.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운명에 따라 살아가는 인형 같은 존재인 걸까.
살인사건 기사를 쓰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떠난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저승사자의 방문을 어느 날 갑자기 받은 것이라고.
J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 된 대학생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밤, 그녀는 복부에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길가였고, 발견 당시에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려 숨을 거둔 상태였다. 소지품은 그녀의 가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별다른 다툼의 흔적도, 반항의 자국도 없었다. 범인은 흉기를 미리 준비하고, 애초에 그녀를 해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형사들은 원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망을 좁혀갔다.
J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다. 사건 당일 그녀는 그와 함께 놀이공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에는 아르바이트가 있어 미리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결국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도 남자친구였다. 하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곧바로 확인되었다. J가 살해되던 순간, 그는 막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죽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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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내역과 주변 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탐문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도 형사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숨기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돈 문제, 이성 문제 등, 애초에 존재하던 갈등들이 얽혀 있는 삶. 작은 눈덩이가 눈밭을 구르며 덩치를 키우다 결국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눈보라를 일으키며 무너지는 것처럼, 갈등도 그렇게 파국을 맞는다. 때로는 죽음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남기면서.
하지만 J는 그런 종류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비밀을 품기에는 그녀의 삶이 너무 짧았다. 평범의 기준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보통’의 삶,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벌고, 애인과 놀이공원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학교와 친구들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그런 평범한 대학생.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풀어야 할 지 막막한 경우였다.
형사들은 골목마다 설치된 CCTV를 일일이 확보하고, 수십 시간을 들여 분석한 끝에 겨우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범인은 J와 아무런 접점도 없는, 세상과 자신의 삶에 깊은 분노를 품고 있던 또 다른 청춘, K였다.
온 세상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분위기로 들떠 있던 어느 밤, K는 식칼 하나를 품고 길을 나섰다. 오늘 마주치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리고 마침 인적 드문 길을 걷고 있던 J를 본 순간, 그는 주저하지 않고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
불시에 칼을 맞은 J는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을까. 엄마를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던 걸까.
119에 구조 요청을 하고 자리에 멈춰 기다렸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집을 향해 걷는 동안 피는 더 많이 흘렀고, 결국 쇼크로 의식을 잃었다.
J의 사건은 ‘묻지마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고, 며칠 후엔 뉴스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은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후로도 종종, 그 시기를 형벌처럼 묵묵히 견딜 그녀의 가족을 떠올렸다.
이제 막 꽃을 피워보려던 청춘 J, 긴 머리, 가느다란 팔다리, 아직 소녀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 사건을 일으킬 만한 촉매가 전혀 없었던 단순하고도 깨끗한 삶. 그런 인생마저도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잔인한 범죄보다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저 운이 나빴다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오랜 친구도, 함께 점심을 먹은 동료도, 그리고 나 역시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 위에 서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가 그날, 다른 길로 돌아갔다면?
조금만 더 늦게 혹은 일찍 애인과 헤어졌다면?
그 시간대만 비켜갔더라면,
그녀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까?
정해진 운명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애써 발버둥치며 살아본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덮쳐오는 어둠의 그림자를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J가 겪은 것과 비슷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삶이 내 손에서 멀어져 있다는 느낌 속에서 무기력과 허무에 잠겨 지냈다.
하지만 운명과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결국 한 가지 생각에 이르게 됐다.
“오늘을 더 충실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쳤을 때, ‘이럴 줄 알았어’ 하며 체념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선 건 우리 모두 같다. 죽음뿐 아니라, 고난과 불행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정체 모를 무언가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는 것, 어쩌면 그게 가장 큰 불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후로는 사주팔자도, 별자리도, 오늘의 운세도 보지 않았다. 오직 하루를 충실히 살았다는 만족감이 내 삶의 원동력이 되기를 바랐다.
죽음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의외로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