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건축사님과 계약하던 날, 집에 대한 두루뭉술한 로망으로 가득한 내 다이어리를 꺼내어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대화 중 펼쳐 보인 삐뚤빼뚤한 그림과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쓴 다이어리를 보고 건축사님은 사진을 한 장을 찍어줄 수 있냐고 하셨다. 건축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기에 내가 써둔 메모들이 좋은 정보가 된다며 참고하겠다고 했다. 일 년 가까이 집에 대해 고민하며 일상을 공간에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지 생각했기에 몇 가지 확실한 요구사항이 있었다.
1. 안방은 잠을 자는 기능에만 충실한 단순하고 작은 공간일 것.
2. 화장실-화장대-드레스룸-세탁실의 동선이 하나로 이어지되, 가장 사적인 공간이 되도록 배치할 것.
3. 외부창고, 주방과 팬트리, 드레스룸에 모든 수납을 집중하고 다른 공간에는 수납 가구를 최소화할 것.
4. 대출 시 방공제와 혹시 모를 가족계획을 위해 아이방은 한 개로 만든 후 나중에 두 개로 나눌 수 있을 것.
5. 유지와 보수가 편해야 하고, 집 안에는 '구석'이 될만한 공간 없이 모두 손이 닿도록 할 것.
그 외에도 수납공간 구성,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지, 집에서 하고 싶은 것, 현재, 그리고 앞으로 추구하는 생활 방식, 가족과 손님의 동선, 아이가 자랐을 때 등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분명히 원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다이어리를 다 보여드릴 수 없음이 아쉬웠다. 대화 끝에 "로망이 참 많네요."라고 말씀하신 걸 보아 웬만한 것을 다 얘기했다 싶었다.
현황측량 결과에 대해 전화를 통해 짧은 협의를 한 후 약 2주 만에 드디어 1차 설계 미팅이 시작되었다. 건축사님은 도면에 대한 설명에 앞서 다양한 외장재, 지붕의 형태 등을 보여주며 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좀 넓혀보자고 했다. 가져오신 자료에 나온 몇몇 사진이 내가 모아둔 레퍼런스와 분위기와 형태 등이 비슷해서 내가 원했던 방향을 잘 이해하신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계약 날 너무 분위기, 느낌만을 추상적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도면 검토를 시작했을 때, 아쉬움이 앞섰다. 앞에서 보여주신 자료의 느낌을 보며 한껏 기대했는데 그것과는 다른 느낌의 도면이 나타난 것이다. 건축사님이 보여 주신 설계안은 분명 멋진 집이었지만, 우리의 로망이 아닌 건축사님의 미감만이 잔뜩 들어 있는 듯했다. 직사각형 두 개가 관입된 형태의 도면이 있고, 그에 대한 여러 지붕 형태가 제시되었다. 하지만 눈에 차지 않았다. 내부 공간에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한눈에 보아도 내 기준에서 구석이라 볼만한 공간이 많았고, 방마다 수납공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영되지 못한 요구사항이 많았던 것이다. 옆에 앉아 종이를 넘기는 남편의 어색한 몸짓을 보며 굳이 고개를 돌려 표정을 보지 않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내부 공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 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다. 건물 형태는 건축사님이 알아서 만들어주실 거라는, 또는 어떤 멋진 대안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면을 받았을 때 사실 우리가 원했던 집의 겉모습도 거의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단순하고 소박하며 정직한 형태. 기교가 들어있지 않고 복잡하지 않은 형태의 집을 아름답다고 여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네모가 합쳐져 여러 개의 각이 있는 형태의 집에서 우리는 속으로 실망을 삼켰다.
건축사님은 지붕의 형태를 함께 고민해 보자며 작은 모형까지 준비해 놓으셨는데 차마 지붕을 얹어보는 단계까지 갈 수 없었다. 땅의 모양과 크기가 정해져 있기에 설계에 한계가 있음을 이해하지만 이 그림은 우리의 집이 될 수 없었다. '로망은 내가, 설계는 건축사가'라고 생각해 왔는데 첫 도면은 설계뿐 아니라 로망까지 건축사님의 몫인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눈치채고 말로 의견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원하는 것을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건축사님이 혹시 몰라 대안으로 준비해 두셨다는 기역자 형태의 도면을 보며 일(一) 자로 만들 수는 없냐며 의견을 냈다. 더불어 반드시 반영되길 원했던 것을 한 번 더 강조드렸다.
이제 다시 우리의 로망이 건축사님 손에 맡겨졌다. 1차 미팅을 완전히 뒤집고 거의 원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의 머리에 있는 것을 꺼내어 도면으로 그려내어 만족시켜야 하는 건축사라는 직업에 어떤 고뇌가 있을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로도 정확히 표현하기가 힘든데 도면이라는 작업물이 나와야 하니 창작의 고통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우리 집을 짓는 과정이 아니라면 미안함이 커서 원하는 것을 다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설계가 끝날 때까지 그 마음을 마음속에 묻어두려 한다. 실망도 접어 두어야지. 어떻게 첫 술에 배가 부르겠는가. 다음 2차 미팅에서는 어떤 도면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만을 가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