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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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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곱째별 Mar 07. 2024

thanks for the blue curry

푸른 카레에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샤워를 하고 머리도 감고 새 감청색 투피스를 입었습니다.

유기농 야채수를 마시고, 요거트에 견과류를 넣어 먹고, 작은 토마토에 칼집을 열십 자로 내어 자작한 물에 끓이다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서 먹었습니다.

그동안 아끼느라 거의 든 적이 없는 10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 온 최고급 가죽 가방을 꺼냈습니다.

가방과 같은 색상의 부츠를 신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 가까운 주유소에서 세차도 했습니다.


개강날입니다.

새로 만나는 학생들에 대한 나름의 정성과 예의를 다했습니다.


학교 앞 단골 카페에 들러 늘 마시는 카푸치노 한 잔과 조교에게 줄 아이스초코라떼를 주문했습니다.

강의실에 미리 들어가 하나둘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넵니다.

짧은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둘 제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한 학생이 카레를 만들어 갖고 온다고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지난겨울 특강 때 요리 잘하는 어느 학생이 카레를 만들 때 양파를 버터에다 한 시간이나 볶아서 캐러멜화 해서 만든다고, 다른 학생들이 엄청 맛있다고 하기에, "나도 먹고 싶다." 한 마디 툭 했는데 그 학생이 "해 드릴게요."라고 답했습니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라는 인사말을 정말 밥 먹는 걸로 아는 저는 그 학생이 언젠가는 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개강 날 해 온다는 겁니다. 제 수업시간을 미리 알아내서요.


기다렸습니다.


급하게 만들어 시간 맞춰 오느라 얼굴이 바알게진 그 학생이 맨 손에 연두색 타파웨어를 들고 왔습니다.

제 수업을 두 학기 연달아 들어서 이번 학기엔 수강신청을 못했지만, 한 번 읽기도 어려운 지난 학기 필독서  <월든>을 3독 한 학생입니다. 아기염소를 좋아하고 영화를 즐기고 음악을 매우 깊이 있게 알고 주변 사람을 아주 잘 챙기는.


학생이 만들어 온 카레를 들고 차로 갔습니다. 한 숟갈 떠먹어보았습니다. 지방이 풍부한 닭고기 카레였습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와 쌀을 씻어 놓고 콩이와 반 바퀴 산책을 하고는 콩이 밥을 먼저 먹이고 들어와서 밥을 했습니다.

밥이 되는 동안 얼른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서 바깥 흔적을 싹 지우고, 카레를 냄비에 데웠습니다.

갓 지은 밥에 카레를 부었습니다. 입안에서 녹는 버터맛과 흐물거리는 양파와 비정형 닭고기 덩어리와 카레 점액과 그에 엉킨 밥알을 음미했습니다.


나흘 전 카레에 관한 글을 써 놓고 발행하지 않았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카레에 관해서는 하고픈 말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지난 학기 학생이 카레를 만들어다 주는 것보다 더 고마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맛도 좋지만 그보다 정성이 가상하고 그 무엇보다 약속을 지키는 점이 훌륭한 그 학생의 앞날에 사랑과 행복과 풍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이렇게 학생의 사랑받으며 시작하는 이번 학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과 지나온 충실한 시간이 고맙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밝은 미래 또한 미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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