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7~28/1201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 비가 내렸다. 여섯 시 반에 새만금 해창 갯벌 진흙이 묻은 낡은 등산화를 신었다. 대전역에서 08:06 출발 무궁화호를 탔다. 토요일에 온 문자 때문이었다. 발신인은 보인이었다. 내가 보인이라고 부르는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
2019년 12월 29일, 김진숙과 소금꽃나무들의 희망 도보행진, 서울에서 ‘동행버스’를 타고 내려가 대구 스파밸리에서부터 걸어 도착한 영남대 의료원 고공 농성장 위에 있는 그이를 처음 보았다.
일 년여 후 2021년 겨울,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복직을 위해 시인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40일 넘게 단식할 때 릴레이 하루 삼천 배 투쟁을 조직해,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각자 백팔 배를 하면서 동참하게 한 그이를 엄동설한 청와대 앞과 숙소 그러니까 땅 위에서 만났다. 통성명하던 중 나는 탈핵 운동 중 평등한 관계를 위해 일곱째별이라는 필명을 쓴다고 했고, 환한 미소의 그이는 자신을 ‘보인’으로 부르라고 했다.
2022년 봄, 휴대 전화기의 모든 연락처 삭제 후 칩거했을 때 그이가 안부를 물어왔고 간식을 보내준 따사로움이 계기가 되어 대구를 지나는 길목엔 늘 그이에게 안부를 물었다.
2022년 여름, 경주 나아리로 가는 길에 대구에 들른 내게 밥을 사주고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황분희 부위원장님께 빵을 선물한 보인.
2023년 가을, 첫 출간 후 보내드린 <일곱째별의 탈핵 순례>에는 그이를 향해 걷던 2019년 12월이 기록되어 있었다.
2024년 8월 17일, 아리셀 참사 희망버스로 화성에 가는 길에 혹시 오셨는지 문자로 물었다. 답이 없었다.
9월 15일,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 10주년을 알리기 위해 고성 통일전망대부터 경주 나아리까지 자전거 순례 도중 강구 가는 길에 잠시 정차한 동대구에서 한가위 인사를 전했다. 답이 없었다.
이유 없이 그럴 성품이 아니라 심상치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계속 걱정하고 있던 보인으로부터 답이 온 건 8월에서 석 달 후인 11월 23일 토요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필리핀에 4개월 있다가 바로 구미 옵티칼 동지들과 함께하기 위해 부산에서 구미까지 걸어요. 이틀째’
곧바로 일정과 노선을 물었다.
다음 날 일정표가 왔다. 3일 차인지 확인하는 내게 그이가 물었다.
‘언제 오실 수 있어요?’
그이는 내가 오리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벌써 갈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7월부터 매주 드리던 부안 해창갯벌 새만금 생태계 복원 기원 마지막 월요 미사가 있었다. 미사 후 돌아온 밤에 서둘러 짐을 싸고 눈을 붙였다.
청도역~팔조령 휴게소 14km
수년간 전국을 도보 순례했지만 청도역은 처음이었다. 소싸움과 운문사로 유명한 청도에 오기 위해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빗속에 대전역으로 이동했다. 두 시간 반만인 오전 10시 반 청도역에 도착했다. 우비까지 챙겼는데 다행히 비가 그쳤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였다. 푸른 조끼가 나누어졌다. 유성기업과 함께 한 4년 이후 모처럼 만나는 금속노조 조끼를 보니 형제를 만난 듯 반가웠다.
조끼 앞에는
박정혜 소현숙
옥상 아닌
공장으로
뒤에는
일본 먹튀기업
옵티칼은
고용을 책임져라
문구가 있었다.
오전 11시.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맨 앞에는 차해도 한진중공업 퇴사자, 그 뒤에 장영식 사진작가와 함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과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이 걸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들을 위해 35m 높이의 85호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309일간 고공 농성했던 김진숙 지도위원과 2019년 노조 활동 보장을 촉구하며 영남대 의료원 74m 옥상에서 227일간 농성했던 박문진 지도위원. 이들이 320일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옥상에서 농성하는 박정혜·소현숙 후배 노동자를 응원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희망 뚜벅이를 부산 호포역에서부터 시작한 지 5일째였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주)는 2003년 11월에 박용해 / 모리카와 아키히고 공동대표로 설립하고 12월에 구미 국가 제4단지 23B 3L에 기공식을 한 일본 니토덴코(Nitto Denko)의 한국 자회사이다. 니토덴코는 미국의 애플과 한국 삼성 디스플레이, LG 디스플레이 등 글로벌기업들에 디스플레이 생산 제품을 납품하는, 일본 오사카에 본사를 둔 100년 넘은 화학제조업체다. 다국적기업 니토덴코는 외국투자기업이라 한국에서 토지 무상임대와 법인세, 취득세 등 각종 세제 혜택 지원을 받았다.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는 LG, 평택 한국니토옵티칼에서는 삼성 디스플레이 제품을 생산했다.
그런데 2022년 10월, 구미 공장이 화재로 전소하자, 공장을 폐쇄하고 모든 물량을 평택 한국니토옵티칼로 옮기고는 (제품 차이 때문에 한 달간 구미 노동자들을 평택에서 일하게 하고는) 구미 공장에 청산을 통보했다. 한국인의 노동력과 혈세로 20년 가까이 매출을 올려 이익을 취하고는 사고가 나자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을 권고한 것이다. 노동자 210명 중 193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고용 승계를 원하는 17명은 정리해고되었다. 이들은 11명이 되었다가 현재 7명이 남았다. 사측은 평택 공장에 30명 추가채용을 하면서도 구미 공장 사원들을 고용 승계하지 않았다. 이는 외국투자기업으로서의 혜택은 다 받고 사회적 책임은 지지 않는 소위 ‘먹튀’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잿더미가 된 직장에서 고용 승계를 요구하던 7명은 단전, 단수, 손해배상 가압류 등 갖은 탄압에 맞서 투쟁했다. 그럼에도 사측이 이들을 만나주지도 않자 올해인 2024년 1월 8일 박정혜·소현숙 두 사람이 옥상으로 올라가 고공 투쟁에 돌입했고 320일이 된 것이었다.
이들을 위해 김진숙 지도위원(이하 생략)이 박문진 지도위원(이하 생략)과 함께 걷자고 제안했다. 박문진은 필리핀에서 넉 달 동안 자원봉사를 하다가 귀국하자마자 준비 없이 뚜벅이를 시작해서 무릎이 좋지 않다고 했다. 준비 운동 부족 때문이 아닐 것이었다.
2012년 10월 23일부터 57일간 날마다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사택 앞에서 영남대 의료원 해고자 복직, 영남대 병원 노사 문제 해결, 영남학원 사회 환원, 쌍용자동차 문제해결 등을 내걸고 삼천 배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10년 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복직을 위해 그 추운 겨울에 청와대 앞에서 40일 가까이 날마다 천 배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2시 30분. 협동조합 온누리 마당에서 최초 휴식이자 점심식사를 했다. 청도할매김밥이 나누어졌다. 삼삼오오 나눠 앉아 싸 온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대전역 성심당에서 사 온 튀소 삼총사 세트는 개수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부추빵을 김진숙이 드셔서 좋았다. 박문진은 무릎 통증이 심해 대구에서 오신 분이 치료를 해주셨다. 휴대용 버너 위 양은 주전자에 물을 끓여 커피믹스도 마신 후 다시 출발했다.
잠시 빗방울이 떨어지다 그쳤다. 바람은 찼지만 푸른 하늘이 맑았다.
이날부터 합류해 촬영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이 뚜벅이들에게 질문했다.
“연대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 질문은 걷는 내내 화두가 되었다.
잠시 후 팔조령에서부터는 계속 오르막이었다.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카메라 무겁겠는데 들어드릴까요?”
옆에 가던 한 여자분이 물었다. 한두 마디 대화가 오고 갔는데, 아~ 그분은 영화 주인공이었다. 지난 10월 말, 살살 페스티발 첫날밤에 군산 하제마을 팽나무 앞에서 본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 2> 첫 편에 나오는 교사. 학내 여학생들에게 성폭력 피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공론화했다는 이유로 전보 조치를 받고,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전보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그 선생님이셨다. 공공연한 비리가 있는 사립학교도 아닌 공립학교에서 생긴 일이었다.
자신들을 지켜주려다가 오히려 해를 입는 교사의 모습을 본 피해 학생들은 이후 말할 것을 말해야 할 삶의 갈래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가해 학생이 사과 대신 2차 가해를 하는 상황에서 그들 역시 올바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교과서와는 딴판인 현실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혜복 선생님이 학교로 돌아가는 세상, 박정혜·소현숙 사원이 땅으로 내려와 공장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뚜벅뚜벅 걸었다.
뒤돌아보니 박문진 지도위원이 천천히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그 좌우로 대구에서 문진해주러 온 분과 금속노조원과 장영식 사진작가가 함께 걷고 있었다. 무릎 통증을 참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박문진은 함께 걷는 이들 덕분에 이날 14km를, 아니 첫날부터 근 100km를 걸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팔조령 휴게소에서 닷샛날 일정이 끝났다. 참가자들은 지역별로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고도가 높아 바람이 세찼지만, 가을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었다. 김진숙·박문진 두 분의 활짝 핀 웃음처럼. 연대는 기쁨이다.
팔조령 휴게소~기쁨의 꽃동산 15km
다시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대전으로 가서 이른 기차를 탔다. 영동 지나는데 올해 첫눈을 보았다. 첫눈치고는 폭설이었다. 눈길에 걸을 도보가 걱정되었는데 잠시 후 그쳤다.
10시 12분, 청도역에서 내렸다. 정진우 조직국장의 차를 타고 팔조령 고개 넘어 터널 지난 곳에서 출발했다. 이날은 스무 명이 좀 안 됐다.
얼마 가다 신유아 문화예술활동가가 합류했다.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사진 찍는 그이가 오자 갑자기 뚜벅이 행렬이 싱싱하게 펄떡였다.
잠시 후 녹색당 성미선 나무가 합류했다. 순간 김진숙 복직을 위해 단식하던 그이의 40일, 2021년 1월과 2월이 오버랩되었다.
https://www.gilmokin.org/index.php?mid=board_02&page=4&document_srl=13720
https://www.gilmokin.org/index.php?mid=board_02&page=4&document_srl=13912
나무는 서울에 눈이 많이 와서 기차를 놓쳐 다음 기차로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그이는 트렁크에 단호박 죽과 삶은 고구마를 한가득 싣고 왔다. 전날 배추 150 포기 김장을 하고서는 드러누워도 시원찮을 텐데 눈길에 청도까지 온 통에 나무의 목이 휑했다. 그런데 장영식 사진작가가 목도리를 풀어 나무 목에 감아주셨다. 그리곤 귀여운 엄지 장갑도 끼워주셨다. 전날 점심 식사 후 공간 책임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찾으시는 모습에서 느낀 인간미가 물씬 배가 되는 순간이었다.
눈발이 날리는 듯하다 그쳤다. 올해 첫눈을 뚜벅이들과 함께 맞았다. 낭만은 없어도 연대는 빛난다.
이 뚜벅이는 중간에 휴식 시간이 없다. 점심식사 시간이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다. 마침 화장실도 있고 의자도 있는 체육공원이 나왔다. 통영에서 우리밥연대 김주휘 활동가가 바리바리 가져온 충무김밥과 된장국과 나무의 단호박 죽과 고구마에 귤도 떡도 풍성했다. 이날 대전역에서 사 온 성심당 순수 마들렌은 20개들이였는데 식후에 한 개씩 나눠주니 서너 개가 남았다. 신유아 활동가가 뜨개실로 HOPE가 새겨진 발바닥과 PEACE가 새겨진 고래 모양 고리를 나눠주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이럴까? 먹고 마시고 선물도 받으니, 연대는 즐거움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식전인지 식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내 앞에는 김진숙·박문진 두 분이 씩씩하게 걷고 계셨다. 두 분의 30년 넘는 우정의 대화는 더할 나위 없이 친밀했다. 이날 박문진의 착지력 좋아 보이는 운동화는 김진숙이 당근에서 사다 준 것이었다. 신발 덕분인지 걸음이 전날에 비해 사뿐사뿐 편해 보였다.
옵티칼 고공 두 사람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을까. 앞에 걷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크레인에서 고공 농성했을 때 몸 양쪽의 체온이 달랐어요. 그때 체온이 35도 몇 부였어요. 체온이 낮으면 암이 발병한다는데…….”
아홉 발자국이면 한 바퀴를 도는 한 평 남짓한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에 한겨울인 2011년 1월 9일에 올라가 봄, 여름, 가을. 몸도 마음껏 뒤척이지 못한 채 309일을 지냈다. 그 때문이었겠지. 그게 아니면 고공에 오르기 전 김주익과 곽재규 열사를 묻고, 그 아픔에 8년 동안 보일러를 켜지 않고 냉골 방에서 지냈기 때문이었을까.
머리카락이 다 쇨 정도의 고뇌와 근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오십 대 초반에 반백이 되어버린 그이는 2018년부터 암 투병을 했다. 그 몸으로 2019년 겨울에는 친구 박문진을 위해 부산부터 대구 영남대 의료원까지 걸었고, 2020년과 2021년 겨울엔 수술을 앞두고 복직을 위해 부산부터 서울 청와대 앞까지 34일 동안 천 리를 걸어온 그이였다.
그이가 암 수술을 받고 우울했을 때 유일하게 한 사회활동이 ‘당근’이었다고 했다. 당신의 근처에 있는 이웃의 무료 나눔 과잠(학과 점퍼)과 그이의 트레이드 마크인 푸른 작업복 바지가 잘 어울렸다. 그이가 그 푸른 작업복을 입고 2021년 2월 7일 청와대 앞에서 복직을 소원하며 연설했던 모습과 2022년 2월 25일 부산 HJ 중공업에서 명예복직 및 퇴임 연설했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그이의 37년 해고 세월 중 고작 마지막 3년을 스쳤을 뿐이었다.
충격을 받으면 멍하니 아무 말도 못 하는 나는 폭풍처럼 밀려드는 상념과 자괴감 속에서, 그래서 지금은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왔냐고 소리 내 묻지도 못했다. 그 질문이 지금까지 입안에서 뱅뱅 돈다.
금세 기쁨의 동산이었다. 산자락 앞 우뚝 서서 가지만 남은 은행나무 앞이 포토존이었다. 그 나무가 김 지도위원 같다는 장영식 사진작가의 말에 존경심이 담긴 게 느껴졌다. 2019년 영남대 의료원으로 향하던 희망 뚜벅이 행진에서도 장영식 사진작가의 자리는 항상 김진숙 지도위원 옆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2011년 11월 10일 민중의소리 기사 사진 속, 310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옆에 있는 차해도. 2022년 1월 10일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나도 김진숙 복직 투쟁 릴레이 1일 단식하며 피케팅 할 때 백발로 당당하게 서서 까랑까랑하게 구호를 외치던 사람 차해도. 지나친 숱한 사람 중 그의 얼굴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백발의 아우라 때문인지 한마디를 해도 웃음이 나는 유머 때문인지 은근슬쩍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미 때문인지 모르겠다. 스치기만 해도 정감이 느껴지는 이분은 희망 뚜벅이 맨 앞에서 길잡이를 했다. 전국을 혼자 도보 순례할 때 걸핏하면 길을 헤맨 내가 보기에 뚜벅이에서 길잡이는 가장 중요한 사람. 그는 포부도 당당하게 늘 선두에서 길을 안내했다.
단체 사진을 찍고 전날처럼 빙 둘러 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우리밥연대 김주휘 활동가가 울었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가린 그의 곱은 손가락이 밴드로 감겨 있었다. 십 년 동안 그 손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밥을 해 먹였으면 그럴까. 연대는 희생이고 사랑이다.
이날 걷는 내내 솟아오르던 희망과 기쁨에 이어 화기애애한 나눔으로 우리가 구미에 도착하면 박정혜·소현숙 두 사람이 곧 내려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연대는 희망이다.
칠곡호이영화관~한국옵티칼하이테크 14km
목, 금 수업을 하고 토요일 신간 북토크를 하고 서울에서 서대구역행 기차를 탔다. 찬 기온에 기차가 연착해 10시 10분 도착 시각에서 7분이 넘어있었다. 역사에 박문진 지도위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이가 있어야 전원 출발을 하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대구 동지 승용차를 타고 이동했다.
박문진은 입고 온 파란 파카를 김진숙이 당근으로 사줬다고 소박하게 자랑했다. 박문진, 당신의 근처에는 신기고 입히며 알뜰살뜰 보살펴주는 친구가 있네요. 연대는 돌봄이다.
조심스럽게 영남대 의료원 고공 농성 당시에 어떠셨냐고 물었다. 명상했다고 하셨다. 함께하던 동료가 건강상의 이유로 내려간 후 아래에서는 걱정이 더욱 심해졌고, 혹시라도 나쁜 마음먹을까 봐 염려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옵티칼은 둘이니 괜찮을 거라고. 당시 영남대 의료원 투쟁의 혁혁한 승리의 과정을 설명하는 박문진에게서 찬란했던 그날이 비쳤다.
다행히 10분 전 11시에 출발지인 칠곡호이영화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 여느 날보다 많게 70여 명이 출발했다. 그중 지역 정치인이나 유명 언론사 기자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순수하게 정성이 담긴 뚜벅이였다. 연대는 진심이다.
전남도민의 숲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사람이 많아지자 떡과 김밥의 공급이 들쭉날쭉했지만, 이날도 삼삼오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었다. 의사 한 분이 합류해서 뚜벅이 몸 상태를 살펴보고는 장영식 사진작가 무릎에 파스를 붙여주셨다. 뚜벅이 열흘 완주자는 걸을 만해서 걷는 게 아니라 투지를 다해 걷는 중이었다.
오후 3시 문화제에 맞춰 가야 하기에 서둘러 다시 걸었다. 다들 속도가 정말 빨랐다. 세 시간여에 15km면 한 시간에 대략 5km. 보통 시간당 4km 잡는 도보순례에서 매우 숨 가쁜 걸음이었다.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다시 걸었다. 공장 단지를 돌고 또 돌아 저만치 옵티칼이 보였다.
맨 앞 김진숙·박문진 두 분이 울기 시작했다.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기라도 하려고’ 부산에서부터 160km를 걸어 구미까지 왔다. 당신들 고공의 시간이 있었기에, 박정혜·소현숙이 느끼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여기까지 걸어왔을 것이다. 저 멀리 건물 뒤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손을 흔들며 휴대 전화기로 우리를 찍었다. 아마 그 장면을 재생하며 외롭고 추울 때마다 버티리라.
불탄 공장에서 뚜벅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따끈한 어묵탕이었다. 어묵을 먹는 사이 두 분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꼭 안아주었으리라. 힘차게 격려했으리라
잠시 후 넷이 나란히 옥상 난간에 섰다. 지도위원 둘은 농성자들이 선물한 스카프를, 농성자들은 지도위원들이 선물한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들 넷의 고공의 시간, 309일+329일+227일. 그날 그곳의 시계는 865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 시에 맞춰 문화제를 시작했다.
먼저 고공의 두 사람이 뚜벅이들을 기다리며 만든 컵과일을 선물했다.
민중의례 후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최현환 지부장과 이지영 사무장이 나왔다.
지부장은 일본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6월) 니토덴코 주식 100주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옵티칼 노조는 10월 2일에는 한국 NCP(연락사무소)에 닛토덴코, LG디스플레이에 대한 진정서를 냈다. 한국니토옵티칼이 속한 공급망 최정점 미국 애플 본사에도 이번 사태에 대한 ‘공급망 인권 실사' 촉구 서한을 보냈다. 11월 26일에는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일본 연락사무소(NCP)에 ‘다국적기업 기업책임경영 가이드라인 위반'을 이유로 한국옵티칼 본사 니토덴코에 대한 진정서를 접수했다.
오사카·도쿄 원정 투쟁은 일본 정부와 본사 압박, 단체교섭요구 투쟁으로 진행했고, 오사카 유니온 네트워크에 한국옵티칼하이테크가 가입해서 노동위에 정식 제소했다고 했다. 도쿄에서 3주 선전전을 하니 한일연대를 하면서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 많이 배웠다고 했다.
공연도 있었고 지역별 연대 발언이 있었다. 나는 어느 지역에도 나가지 않았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지난 11월 2일 고공 농성 300일 차 옵티칼로 가는 연대버스 때 나는 그곳에 오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심하게 아팠었다. 그런데 박문진과의 우정으로 시작해 박정혜·소현숙 두 사람을 위해 걷는 동안 내 마음이 건강하게 회복되었음을 알아챘다. 연대는 위로다.
모두의 발언이 거의 끝나고 열흘 완주한 다섯 분 중 세 분이 앞으로 나갔다.
그간 자동차로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른 정진우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조직국장과 차해도 한진중공업 퇴사자와 장영식 사진작가. 김과 박 포함 평균 연령 육십이 넘는다는 분들 중 차해도의 발언을 옮긴다.
“영남대, 청와대, 차별철폐, 옵티칼 네 번의 희망 뚜벅이를 겪었습니다. 이 투쟁 승리의 소식 전해주면 다시 걸어올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문진·김진숙 두 분이 모두의 앞에 섰다.
“동지들 반갑습니다. 박문진입니다.
저는 필리핀에서 4개월 정도 자원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진숙의 꼬임에 넘어가서 일찍 귀국해서 같이 걸었습니다. 필리핀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랬던 건 우리 모두 동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연대는 소극적이라도 뻘쭘하더라도 우리가 조금씩 걷다 보면 길이 내고 만들다 보면 큰 길이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뚜벅이들의 길은 언 마음을 녹여주는 열정이었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하고 뭉클한 우정이었고 투쟁의 불씨를 지피는 연대와 함성이었습니다. 이 길이 끊이지 않고 우리가 어떠한 형태든지 큰길을 만들어서 승리하는 큰 성과를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뚜벅이들의 발걸음은 승리의 천둥소리다
투쟁 속에 동지 있고 동지 속에 승리 있다.
현장으로 돌아가자.”
야리야리한 몸 어디에서 그렇게 날카로운 소리가 나오나 놀라웠다. 역시 투쟁의 내공이었다.
마이크는 김진숙에게로 넘겨졌다.
“열흘 동안 287,529 걸음, 하루 평균 약 3만 보 걸음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박정혜·소현숙 동지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안 오고 싶었습니다. 굽이굽이 어떤 길을 얼마큼 걸어야 하는지 알기에 진심으로 안 오고 싶었습니다.
‘전 이제 안 돼. 그 몸으로 넌 이제 먼 길을 걸을 수 없어.’
끊임없이 스스로와 타협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아래를 향해 흔드는 저 손짓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기에 안 보고 싶었습니다.
겨울, 봄, 여름, 다시 겨울이 오도록 삭아서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이는 저 두 사람을 정말 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라도 안 오면 저 사람들 어쩌겠습니까?
명태균으로 도배된 언론에서 소현숙·박정혜 저 이름을 우리라도 불러주지 않으면 누가 저들을 부르겠습니까?
철의 노동자 김진숙이어서도, 불사조 김 지도이어서도 아닙니다.
아스팔트 길을 하루 3만 보 걷고 왕복 네 시간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 병들고 나이 든 독거노인일 뿐입니다. 우렁각시가 어디 숨어있다가 저녁에 빨래라도 널어주었으면 좋겠고, 분리수거만이라도 해주면 좋겠다는 소망을 아침마다 빌며 집을 나섰습니다.
길을 나설 때마다 망설임 없이 길잡이가 돼 주는 차해도 동지, 장영식 쌤이 없었다면 나서지 못했을 길입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선뜻 나서준 정진우 동지가 아니었으면 저도 두려웠을 겁니다.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삼천 배를 두 달 동안 하면서 무릎이 고장 난 걸 알면서도, 필리핀에서 중복 장애아동 34명을 먹이고 씻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자원봉사 활동을 넉 달이나 하고 온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박문진과 함께 걷고 싶었던 건 박문진이 고공에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서 박문진이 복직을 했고,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수많은 발걸음들이 모여 내가 37년 만에 복직하는 기적이 옵티칼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2011년 희망버스의 기적으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철회됐듯이 일곱 명 남았다는 옵티칼 조합원들이 공장으로 돌아가는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간절히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옵티칼 조합원 박정혜, 소현숙, 최현환, 이지영, 이희은, 정나영, 배현석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다고 알리고 싶었습니다.
민생을 앞다퉈 외치는 정치인들에게 노동자들의 삶은 민생이 아닌지 묻고 싶었습니다.
세종호텔 해고자가 함께 걸었고, 4년째 길거리 삶을 이어가는 대우버스 노동자들이 함께 걸었고, 6년째 싸우고 있는 (현대) 자동차 판매연대 김경희 동지가 함께 걸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차별금지법 개정을 요구하며 부산에서 서울까지 31일 걷고 46일 단식을 했던 미류 동지와 이종걸 동지가 함께해서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서울에선 학생들에 대한 성폭력을 공론화했다는 지혜복 동지가 오셔서 함께 걸었습니다.
이 여정을 마치고 저희는 오늘 김제 강태완에게로 갑니다. 여섯 살 때 몽골에서 한국으로 와서 26년 미등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청년, 임시로 26년 만에 체류자격을 얻고 취업한 지 8개월 만에 산재로 숨진 노동자. 그토록 살고 싶었던 한국에…… 시신이 되어서야 묻히는 사람. 그는 왜 그토록 한국인이 되고 싶었을까요? 26년이나 외면하고 끝내 죽이고만 이 나라에 그는 왜 그토록 살고 싶어 했을까요?
회사에 진심 어린 사과 그 요구 조건 하나를 거부해 3주가 지났지만, 장례는커녕 빈소조차 차리지 못한 쓸쓸한 죽음. 박정혜 소현숙의 삶과 강태완의 삶은 얼마나 다를까요? 한국에 있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이고 한국엔 어떤 빽도 연고도 없으니 사과조차 콧방귀를 뀌는 사측에게 이렇게 든든한 빽이 있음을, 우리가 강태완의 가족들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당신과 엄마를 긴 세월 숨죽이게 하고 숨어 살게 했던, 끝내 죽이고도 사과조차 못 하겠다는 잔인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따뜻한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청년이 혼자 가는 먼 길 그저 꽃 한 송이 놓아주면 좋겠습니다.
소현숙·박정혜 동지,
걷잡을 수 없이 막막하고 외로운 날은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30만 보를 걸어왔던 그 발걸음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박정혜·소현숙 동지,
끝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날은 그 마음을 너무 잘 아는 두 선배 노동자가 얼마나 당신들을 걱정하는지, 함께 걸었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었는지 잊지 말아 주십시오.
곧 땅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김진숙도 울고 나도 울고 거기 모인 많은 이들이 울었다. 그이의 연설은 늘 눈물 나게 감동적이었다. 그날 나는 보았다. 그이가 문화제 내내 손에 들고 있던 흰 종이 몇 장을. 손글씨로 쓰고 고치고 또 쓴 그 글이 담긴 종이를. 열흘 동안 걷는 내내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쓰고 다듬었을 그 글을.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연설가로 꼽는 그이의 연설은 그렇게 한 발 한 발, 한 글자 한 글자 이루어진 것이었다. 연대는 처절한 감동이다.
이어 박정혜 수석과 소현숙 조직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수석 부지회장 박정혜입니다.
두 지도위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부산에서 구미까지 160km 그 긴 거리를 걸어서 옵티칼로 오셨는데 아프진 않으신가 걱정을 했습니다. 저라면 과연 걸을 수 있을까?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거리라서 두 분 존경합니다. 많은 동지분들이 함께 옵티칼로 와 주셨는데 저도 기적을 믿습니다. 저희는 승리해서 내려갈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조합원들이 정말 열심히 투쟁하고 있고, 많은 동지 여러분들이 함께해 주시고 힘주셔서 빠른 시일 내 승리할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힘 받아서 꼭 승리하는 날까지 열심히 고공에서 투쟁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투쟁.”
박정혜 수석 부지회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느꼈다. 그 느낌은 선배 선물인 목도리를 칭칭 감은 소현숙 조직부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확신으로 이어졌다.
“(상략) 회사에 입사해서 16년 동안 진짜 뼈가 갈리도록 일했는데, 그렇게 같이 함께하자고 했던 회사는 불이 나자 도망갔고, 이 투쟁이 벌어지기 전에는 일면식도 없었던 분들이 저희를 위로해 주셨고 다시 일어날 수 있게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회사는 정말 잔인하게, 저희가 한 달을 벌어 한 달을 사는 노동자라는 점을 이용해서 시간 지나면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 고소하고 가압류 걸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저희와의 대화를 아직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투쟁해서 단 하루를 다니더라도 회사 문턱을 넘어보고 싶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끝까지 저희와 함께, 저희 가는 길 지켜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투쟁!”
그들은 아주 평범하게 십 년 넘게 공장에 다니던 지극히 순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난 10월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수상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순박한 말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김진숙 지도위원은 꽁꽁 싸맨 채 손을 오그리고 있었다. 추위가 엄습하는 듯했다. 지독한 투쟁의 세월을 몸은 구석구석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온 생을 바쳐 이룬 이 땅의 노동사. 그리고 그 역사를 이어가는 연대의 몸부림. 거기 차마 시들 수 없는 백발의 생명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둥글게 서서 옥상을 바라보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문화제는 끝났다. 뚜벅이들이 서로 껴안기 시작했다. 나도 김진숙을 안았다.
“언제든 걸으시면 함께 할게요.”
그 집 우렁각시는 못 되어도 뚜벅이 정도는 자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할 소리였나. 다시 걸을 일이 없어야 좋은 세상이지. 그리고 이런 글도 쓸 일이 없어야 좋은 세상이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박문진을 안았다. 그이의 문자 한 통으로 한달음에 와 여기까지 걸었다. 연대는 우정이다.
돌아가야 했다. 기차역까지 태워줄 사람을 찾았다. 마침 그날 무와 배추를 실어와 나눠주신 함양 농부가 있었다. 이상기온으로 올해 배추 농사는 정말 힘겨웠을 텐데, 일면식도 없는 뚜벅이들에게 배추와 무를 선물로 나눠주신 분. 그분이 농약도 치지 않고 심고 뽑아오신 귀한 배추 한 통을 들고 농부 트럭에 올라탔다. 희망버스 1호차 때도 부산 현장에 계셨던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연대자 동지였다. 트럭을 타고 구미역까지 갔다. 구미역도 처음이었다.
기차를 기다리며 점심으로 먹고 남은 떡을 저녁밥 삼아 먹고 기차에 올랐다. 열흘 동안 전국에서 찾아와 함께 걸어준 이번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 승리 뚜벅이. 그럼에도 그 흔한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 한 명 볼 수 없던 문화제. 어쩌면 이번에 걸은 뚜벅이들은 표를 구걸하거나 눈도장 찍기 위해서가 아닌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오직 박정혜·소현숙 두 사람이 어서 땅에 내려오기를 간절히 응원하고,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일곱 명이 고용승계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사람들. 우리가 걷던 그 길에 퍼졌던 맑고 높은 웃음이 그걸 증명했다. 하지만 밝고 따스하게 걷던 열흘이 지나고 불탄 공장 옥상에 두 사람을 두고 돌아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틀 후 12월 3일 오전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는 국회에서 국회의장과 면담을 진행했다. 금속노조 보도자료에 따르면 최현환 지회장, 이지영 사무장, 박래군 손잡고 대표 등이 참여했고, 국회 쪽에서는 우원식 의장을 비롯해 윤종오, 김주영, 이용우 국회의원이 자리했다. 이날 우원식 국회의장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문제와 관련한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그날 밤 22시 28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시민들이 몸 사리지 않고 국회의사당으로 달려 나가 무장 군인을 막아선 사이 두 시간 반만인 다음날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었다. 4시 27분, 여섯 시간 만에 비상계엄 선포가 해제되었다.
심야의 블랙코미디도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현재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 때문에 국가안보와 경제가 불안정해졌고 중차대한 안건들이 다수 묶여버렸다. 지금도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옥상에는 박정혜·소현숙이 있다. 이 추운 겨울을 그 옥상에서 어떻게 보낼 것인가. 2025년 1월 8일이면 옵티칼 고공 농성 일 년이 된다. 그들이 고용 승계되어 어서 땅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우리의 온기를 보내야 한다. 연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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