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씬기행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몇 번 다루었듯이 두리반이라는 홍대 앞 칼국수집의 임대차 관련 분쟁에서 자립음악생산조합이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이 모임은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한편 시위 현장, 임대차 분쟁 현장 등에서 연대 공연을 펼쳤다. 두리반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후 자립음악생산조합은 다른 공간들에서 자신들만의 공연을 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박정근이라는 사진사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조광사진관으로 자립본부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조광사진관은 평일에는 실제로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 역할을 하면서 주말 저녁이 되면 홍대 앞에서나 볼 수 있는 공연이 열렸다. 장소는 충무로의 인쇄골목 언저리로 사람들이 그다지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사진관의 주인 박정근 씨는 북한이 운영하는 SNS 내용 중 일부를 리트윗하고 풍자를 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이 돼 재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박정근 씨의 사례는 세계 최초로 리트윗 행위 만으로 구속된 경우였다. 해외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박정근 리트윗 사건은 2014년 8월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운영자부터 범상치 않은 이 공간은 인디 밴드의 공연만이 아니라 ‘시네마지옥’과 같은 B급 영화 마라톤 상영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박정근 씨의 친구이자 인디 밴드 밤섬해적단의 드러머인 권용만 씨가 주최한 행사인 시네마지옥은 아침부터 밤까지 연속으로 B급 영화만을 상영했다.
조광사진관의 소개는 ‘증명사진부터 앨범 아트웍 사진까지 사진에 관한 무슨 일이든 해내는 영세 사진관’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사진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햄버거 빨리 먹기 대회 같은 우스꽝스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행사까지 소화해냈다.
물론 사진 포비아를 위한 심포지엄과 같은 사진 행사도 열었지만 자립음악생산조합의 인디 음악 페스티벌인 ‘51+’가 열린 3곳의 메인 공연장 중 한 곳이기도 했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이와 같은 사진과 영화, 인디 음악의 만남에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던 박정근 씨가 큰 역할을 했다. 박정근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비싼트로피라는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을 만들어 활동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물론 고등학교 때에도 강제 야간 자율학습이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런저런 활동을 하니까 4시간 하던 야간 자율학습을 2시간으로 줄여달라고 그랬죠.”라고 말했다.
박정근 씨는 본래 대학에는 뜻이 없었고 사진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생업전선에 나섰다. 직업 사진가의 길을 걷던 박정근 씨는 두리반 분쟁 사건에 첫발을 디디면서 점점 철거민 문제에 관심을 두고 관련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이 시절에 친구의 권유로 사회당에 가입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박정근 씨의 인생행로를 두고 전형적인 사회운동가의 삶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본인은 이러한 관점에 대해 자신은 그저 친구들과 트위터로 낄낄대기를 좋아했을 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국가보안법 사건의 무죄 판결 이후 또 다른 불미스러운 해프닝에 관여되었던 박정근 씨는 현재는 인터넷에서도, 인디 음악계에서도 활동하고 있지 않다. 더불어 그의 사진관이었던 조광사진관도 문을 닫은 상태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이 유명무실해지던 시기,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삶이 조용해졌던 셈이다. 조광사진관 자립본부에서 열렸던 하드코어 펑크 공연에선 팔기 위해서 진열해놓은 시디와 굿즈들이 무너지고 튕겨나가는 열띤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왜 그랬던 걸까.
혹자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던 긴 보수의 집권기를 지적하기도 한다. 두리반 당시, 또 그 이후로 몇 년간 이어졌던 인터넷과 오프라인의 떠들썩했던 젊은이들의 분위기가 왜 한순간에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냥 한국의 모든 문화운동은 한순간에 타올랐다가 사라진다고 비관하는 것이 쉬울지도 모른다.
당시의 분위기를 잘 살필 수 있는 3편의 영화가 있다. 두리반 현장을 핵심적으로 다루었던 ‘파티 51’, 인디밴드 밤섬해적단과 박정근 리트윗 사건을 전면에서 다룬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서울의 하드코어 펑크신에 집중했던 ‘노후 대책 없다’가 그것이다.
이 3편의 다큐멘터리는 2009년부터 2016년 어딘가까지의 치열했던 삶의 기록들을 담고 있다.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조광사진관이 생기기 전의 분위기를 조금 엿볼 수 있다.
자립음악생산조합 운영위원인 단편선은 “작년엔 힘 빠지는 일들이 좀 많았어요. 문래동의 로라이즈, 이태원의 파우와우, 최정화 작가가 운영하던 꽃땅 등 많은 공연장이 문을 닫았고, 한예종 학생회관 지하에 임시로 마련했던 대공분실도 사라졌죠.”라고 답했다.
제3자의 시선 속에서는 언제나 유쾌하기만 했던 그 ‘친구들’의 삶은 철거와 사라짐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것이 실은 전부였다. 계속해서 패배해나가는 삶, 그럼에도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 이들은 하나의 공연장이 사라지면 또다시 다른 공연장을 열면서 끝없는 잔치(파티)를 이어왔다.
그 끝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서울이란 도시 자체가 그들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은 매일처럼 익숙하게 갔던 어딘가가 사라지고 새로운 곳으로 바뀌는 곳이다. 어제 머물렀던 가게가 없어지고 새로운 가게가 권리금을 내고 들어온다. 어제 알바했던 청년이 오늘은 중년의 남자로 바뀐다. 어느 것 하나 뿌리 내리지를 못하고 부평초처럼 물결에 휩쓸려간다.
지금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변화 앞에 직면하려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자립을 외쳤던 ‘친구들’의 행로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립’은 한국 사회에서 사치에 불과하다. 호걸은 사라지고 골짜기에는 호랑이 가죽만 남아있다.
서울씬에 대한 생각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점이 내일은 없는 곳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감각에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은 누구의 고향도 될 수 없는 도시다. 이곳에서 3대를 이어 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토박이란 3대 이후에야 쓸 수 있는 단어다.
미국처럼 이민자들이 모여든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삶을, 자립을 추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지금 서울이란 도시를 이루고 있다. 서울씬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며 여행자다. 잠시 반짝이는 불빛만이 우리를 반긴다. 빛으로 이루어진 도시처럼 보인다. 점점이 이어진 빛의 행로가 길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