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교 입학식 날이다. 한국 아이들 사이로 미국 아이들도 몇 명 보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고생 두 명이었다.
어느 날, 교회에 다니는 한국 친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 한글학교에서 교사를 구한다고 했다.
“나는 가톨릭 신자인데 교회 소속 한글학교에서 교사를 할 수 있을까요?”
“한글학교는 교회와 전혀 관계없어요. 한글학교를 할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 하는 거예요..”
그녀는 내가 적임자라고 했다. 나는 국어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도 이수했다. 이주여성들에게 한글을 2년 정도 가르친 자원활동 경력도 있었다.
자격은 되지만 온라인으로 동영상 강의를 듣고, 실시간 수업도 들어야 했다. 교수역량강화 교육은 한국어 교육실습과 교수법 등 교사가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수업이었다. K-culture, K-history, K-food, K-pop 등 다양한 우리 문화와 역사가 소개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아주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온라인으로 교사 연수를 받고 나서 정식으로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미 동북부지역 한글학교 소속 한글교사가 된 것이다.
우리 반에 눈에 띄었던 미국 여고생 두 명과 초등학교 3학년, 5학년인 교포 3세 남매가 들어왔다.
남매는 부모가 억지로 보낸 듯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돌며 망설였다. 남매의 부모는 교포 2세인데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집에서도 영어로 소통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들만큼은 꼭 한글을 배우게 하고 싶어 했다. 아이들이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성장할 때 한글 교육이 정체성 확립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여고생 중 한 명인 애슐리는 K-pop에 푹 빠져 있었고, 멜리사는 태권도를 배우다 한글학교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애슐리의 부모님은 현직 미군으로 복무 중이었고 아이들이 네 명이라고 했다. 애슐리는 BTS를 좋아해 ‘아미’로 활동하고 있었다. 자기 집 근처에 한글학교가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설득해 왔다고 한다. 얼굴에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첫 수업이 끝난 뒤, 애슐리가 조용히 내게 와 말했다.
“선생님 셀폰 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바로 알려주었고 나도 그녀의 셀폰 번호를 입력했다.
며칠이 지난 후 ‘깨똑, 깨똑’ 깨똑 소리에 셀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와 있다.
‘Hi, I’m Ashley. See you on Friday.' (안녕하세요? 저는 애슐리입니다. 금요일에 만나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고 깨똑 앱까지 다운로드한 것일까?
금요일 날 한글학교에서 만난 애슐리는 수업 후 나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선생님 이름 참 예뻐요. 저에게도 예쁜 한글 이름 지어주세요.”
나는 리아, 하니, 지나, 유진 등 영어 발음이 쉬운 이름을 제안했다. 영어로도, 한글로도 발음이 쉬운 것들이었다. 애슐리는 이것저것 발음해 보더니 '하니'를 선택했다. 애슐리는 이제 '하니'가 되었다. 애슐리 하니는 한국 사람이 된 것처럼 아주 신나 했다. 노트에 한글 이름 '하니'를 써 주었다. 복도에서, 교실에서, 어디서나 얼굴이 부딪치면 웃으며 '하니'. '하니'를 부르고 다녔다.
“제가 집에 가서 연습 많이 해 올게요.”
다음 주, 한글학교에 온 애슐리는 노트에 '하니'라고 쓴 한글을 보여주었다. 쓴다기보다는 그리는 수준이었으나 잘 썼다고 칭찬해 주었다. 애슐리는 어느새 우리 클래스에서 제일 잘하는 학생이 되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학생들에게 기초 자음과 모음부터 한글을 가르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한글 교재와 ‘스터디코리안’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교육부 재외동포청에서 스터디코리안이라는 뉴스레터를 1주일에 한 번씩 한글학교 교사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수업에 쓸만한 유용한 정보가 많이 들어있었다.
다른 나라의 한글학교 소식도 알려주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수업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해결할 수도 있었다.
장구와 꽹과리 등 한국 전통 악기 수업이 있던 날 애슐리는 신이 났다. 사물놀이 공연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장구채도 엉망으로 잡고, 폼만 잡으며 장구 치는 흉내를 내며 빙빙 돌았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장구채를 잡고 제법 소리를 냈다. 학부모님들 앞에서 공연 발표도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장구소리가 생생하다.
‘덩더꿍 덩덕~~ 쿵 더쿵’
애슐리 하니는 한글학교가 끝난 뒤, 나에게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애슐리는 군복을 입은 엄마와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왔다. 직접 쿠키를 구워 온 애슐리 엄마가 진지하게 물었다.
“애슐리가 한국대학에 가고 싶어 해요.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안전할까요?”
“이미 한국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인터내셔널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어요. 한국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깊은 포옹으로 이별을 했다. 애슐리 하니는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떠나는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서로 카톡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겨 버렸다. 이메일 주소를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많이 아쉽다.
'애슐리 하니는 한국으로 대학을 왔을까?'
궁금해서 깨똑으로 안부를 물었으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카톡을 지운 걸까? 아니면 10대인 애슐리 하니의 마음에 변화가 있는 걸까?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없어진 걸까? 하긴 애슐리 하니는 10대인 여고생이니까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60이 넘은 나는 여전히 애슐리 하니가 문득문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