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체가 아닌, 존재로서의 '나'를 문득 생각하게 된 순간
행복이 무엇일까.. 갑자기 잘 모르겠다는 아주 낯선 기분이 들었다.
두세 걸음만 가면 모든 것에 손이 닿는 원룸에 살면서 딱히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비싸진 않지만 예쁜 옷을 코디해 입고 먹고 싶은 소소한 음식들을 사 먹을 수 있고,
책 한 권을 들고 포근하게 파묻혀 잠들 수 있는 침대가 있어 난 풍족한 사람이었다.
사는 내내 부자가 되지 않는다 해도 이보다 더 질이 떨어지는 삶으로 가지 않는다면 난 이 정도 생활도 꽤 만족스럽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대략 짐작만 해봐도 10억은 족히 넘는 재산을 가진 가까운 지인이 내 걱정을 한다.
보험은 최소한 어떤 걸 들어야 하고 연금은 얼마를 넣어야 하며 돈 없이 맞는 노후가 얼마나 누추하고 비참한지 한참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구구절절 옳은 지인의 말.. 갑자기 내 삶에 빨간 신호가 들어왔다.
난 일순간 가난하고 미래 대책이 없는 불안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기자의 신분으로 포럼 현장에 앉아 연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강 하는 말들을 받아 적는다.
스마트시티, 4차 산업혁명, 공유경제, 빠르게 진화하는 모빌리티 시장의 흐름..
열심히 펜을 굴리던 손에 갑자기 힘이 스르륵 빠졌다. 모두 내 세상의 얘기가 아니었다.
여전히 길을 걸으며 치렁한 유선 이어폰을 끼고 퀸이나 7080가요를 듣는 나는
전동 킥보드와 공유 자전거와 최첨단 무선 시스템과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산업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지역 아파트의 분양가가 얼만지 재테크 수단으로 최근 무엇이 뜨고 있는지 크게 관심이 없는 나란 종자란 어떤 인간 유형일까..
가난을 합리화하고 싶지도, 가진 자들과 편을 갈라 그들을 도매금으로 넘겨버릴 생각은 애초에 없다.
정당한 땀으로 쌓은 부는 숭고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누추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세계가 그저 나를 둘러싼 배경화면일 뿐 그것에 큰 관심도 없이 살아가는 나는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 맞는 걸까.. 난 어디에서 왔을까.. 38광년 떨어진 어떤 행성에서 갑자기 이곳 지구로 추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싹싹한 며느리 역할을 할 수 없어 사랑에게 버려지고
보이지도 않는 진심 나부랭이를 찾아가며 사랑을 갈구하는 나는.. 정말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나를 찾는 일은 세상에서 도태되는 가장 빠른 길인 것 같은데..
컨벤션센터를 나와 지하철 역으로 걷는 길에 주변을 둘러본다.
사방이 가로막힌 고층빌딩과 아파트.. 이미 이 도시는 과밀화된 듯한데 뒤로 또 옆으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의 높다란 크레인이 위협적이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우울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