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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Nov 29. 2018

존재, 그리고 이별

이별의 아픔이 때론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더라..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고 기억을 삭제하려 침입한 기계 시스템을 피해 자신의 기억 속에서 달아나고 또 달아나는 영화 주인공. 

그는 연인과 헤어진 후 남은 기억의 잔상들로 괴로워하다 결국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과학자를 찾아가 서비스를 의뢰한다. 기억 자체를 지우면 더 이상 추억 속에서 혼자 아파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당하게 기억을 지우러 기계를 쓰고 누운 주인공. 그러나 그의 머릿속 회로에선 생각지 못한 일들이 펼쳐지고 만다. 기억이 하나 둘 삭제되기 시작하자 그의 의식이 기억 속 연인을 데리고 삭제당하지 않기 위해 도피를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에게 그 기억들의 사라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누군가와 이별하기도 하고,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 무너지기도 한다. 남은 이의 아픔에 대해 굳이 경중을 따진다면, 대체로 사람들은 ‘그래도 상대가 현실에 존재하니까’라는 이유로 사별보다 이별의 아픔을 측정하는 눈금이 더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처럼 아픔의 저울에 올려진 두 경우의 무게는 언제나 사별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둘 사이에 차원이 다른 강이 흘러야만 그것을 ‘죽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이란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현실 세계에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 그래서 헤어짐의 고통을 단계로 나누었을 때 시작에서 가장 먼 극에 있는 것으로 보통은 생각하는 그것. 죽음은 그렇게 우리의 인식 속에 늘 모든 경우의 ‘끝’을 가리키는 지점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할 때만 반드시 이 ‘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라짐, 핵심은 그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사라졌을 때 그와 나눈 모든 기억의 흔적은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는 것. 추억으로 포장된 기억을 더 이상 나누어 가질 상대가 없다는 것. 사별과 이별의 공통적인 아픔은 그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이별이 그러하듯 몇 년 전 내가 겪은 이별도 부슬비가 아닌, 채 우산을 펼쳐들 시간도 없이 찾아온 폭우였었다. 모 가수의 어느 노래 가사처럼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 이별. 십 년이란 세월이 단단하게 만져놓은 추억의 껍데기도 단번의 충격에 산산조각 박살이 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그렇게 껍데기 안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는 나를 외면하고 조각난 틈 사이로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시야에서 서서히 조금씩 부옇게 흐려지던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향해 돌아서지 않았다. 부서진 추억의 껍데기 안에서 난 혼자가 되었고, 남은 기억의 잔재를 정리하는 것도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그것이 부서지며 자잘한 기억들은 단숨에 공중으로 휘발되어 날아갔지만,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굳어진 추억들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방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출근하는 네 손이 시려 보여서….”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퇴근 무렵 회사 앞으로 찾아와 장갑을 불쑥 내밀던 그다. 며칠 전 장갑을 잃어버려 한겨울 칼바람에 맨손으로 출근하던 내 손이 못내 마음에 걸려 부랴부랴 장갑을 사들고 찾아올 만큼 당시 그의 마음속에 내 자리는 넓고 안락하며 굳건했다. 경제적인 부분이 넉넉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사회적 기준과 잣대로 재지 않았다. 작고 따뜻한 마음 조각 하나를 나눠 가져도 그 온기에 배부르고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시던 시절. 누군가가 정해놓은 ‘일반적’ 기준으로 우리를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말들이 사랑으로 쌓아 올린 단단한 벽을 통과하진 못했다. 누군가의 눈엔 보잘것없지만 안락하고 따뜻한 그 성 안에서 나는 늘 평온했다. 그리고 그렇게 차곡히 쌓여가는 추억은 오래된 고가구처럼 물질적 가치로 측정할 수 없이 세월과 함께 무르익어갔다. 나 혼자만 간직한 것이 아닌, 언제든 그것들을 꺼내어 함께 나눌 수 있는 소중한 보물들. 꺼내어 볼 때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찬란한 빛을 발견하거나 세월의 흔적이 묻어 더 멋을 더해가는 추억을 그와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애써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던, 사방에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이 나를 집어삼킬 듯 차례로 아가리를 벌리고 나에게 하나씩 달려들었다.      


“내 사랑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 미안해. 네가 운이 없어 이상한 사람 만났다고 생각해.” 



완만한 곡선으로 막을 내려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별. 

그러나 급작스레 맞이한 그것은 깎아지르는 절벽처럼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내 몸을 격하게 아래로 아래로 집어던졌다. 그렇게 찢기고 상처 난 육신은 시간이 가면 치유되지만, 문제는 10년 간 쌓아놓은 무거운 추억들이 할퀴고 간 마음의 상처였다. 

사랑했던 날들이 달콤할수록 헤어짐 후 남는 그 기억은 잔인하도록 독한 상처로 가슴을 할퀸다. 드러난 상처 표면에 어설픈 더께가 생기면 우리는 이내 곧 자신이 지난 이별의 상처에서 해방되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잠시간의 회상이면 언제든 그 더께가 거둬지고 아물지 않은 상처의 맨 살이 드러난다. 옆에 머물던 사람의 흔적, 그 흔적이 누적되면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고, 추억의 단절을 맞이하는 날, 우리는 이별했다고 말한다.      


나와 그의 추억은 단절되었고, 우리는 이별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를 향한 감정들이 나를 괴롭혔다. 여전히 사랑인지,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들. 그림자도 남겨두지 않고 떠난 그를 추억 속에서 소환해 한참을 보듬고 마주 보다 놓아주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별했지만, 난 이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억의 잔재 속에서 매일을 힘들어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리워하는 건 지금 떠난 냉정한 그가 아니라 나의 추억 속에 아직은 순수하고 따뜻했던 사람이라는 걸. 사랑이 끝났다 선언하고 돌아선 사람이 아니라 추운 겨울 나의 찬 손이 걱정돼 불쑥 회사 앞으로 찾아온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이별 후 나의 가슴을 난도질했던 건 그의 부재 자체가 아니라 추억을 함께 나눌 존재의 사라짐이었을지 모른다. 추억을 더 이상 함께 나눌 수 없는 그의 사라짐. 그는 내게 그렇게 ‘죽은’ 사람이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와의 추억을 지우려 과학자의 침대에 눕고 싶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기억의 사라짐, 존재의 죽음. 굳이 과학자의 침대에 눕지 않아도 그의 존재는 내게서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 죽음을 맞게 되겠지. 새로운 누군가와의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들며 조금씩 잠식되는 갯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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