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결정되고 배포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시안 작업을 거처 각 시안들의 콘셉트와 조형적 심미성, 목적에 맞는 톤 앤 매너 등을 기준으로 가장 적합한 시안을 추려 디벨롭 작업을 진행해 완성도를 높인다. 그 과정에서 시안을 리뷰하는 자리를 갖고, 시안을 작업한 디자이너는 시안에 대한 의도와 그 의도가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이 됐는지 설명한다. 나는 디자이너가 시안을 리뷰할 때 그 시안의 서사를 설명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서사 없이 아트웍만 있는 시안을 볼 때면 막상 번연계에서는 "오! 괜찮네요"라고 내뱉지만, 신피질에서는 '그래서 저게 뭔데?'라고 속으로 외친다. 왜 당신의 시안에는 디자인에 대한 서사가 없을까...
왜 시안에
디자인에 대한 서사가 없을까...
주니어 시절 제안 PT 전날, 사업부장과 디자인 디렉터가 종종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 걸 목격하곤 했다. 사업부장은 기획 전반을 관리하고 디자인 디렉터는 디자인 시안의 크리에티브 퀄리티를 관리한다. 기획이 항상 가장 중요 하지만 제안 PT에서 결국 눈으로 보이는 건 디자인 시안이기 때문에 시안의 크리에티브와 임팩트가 가장 중요했다. 그날도 시안 리뷰가 끝나고 사업부장이 디자인 디렉터를 보며 당황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서 PT때 클라이언트에게 ‘이거 괜찮지 않나요?’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무래도 내일 사업부장이 제안 PT를 하는 차례인가 보다. 사업부장의 말에 디자인 디렉터는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짓고, 멋쩍게 웃었다. 그렇다 시안에는 서사가 없었다.
서사에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내가 이 글에서 정의하고자 하는 뜻은 이렇다. 서사는 이야기나 사건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서사는 문학,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 형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자나 관객에게 이야기의 전개를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서사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서사는 주로 문학에서 사용하는 단어지만 나는 디자인 목적에 맞는 서사를 부여하고 그것이 시각적으로 표현이 됐을 때 클라이언트들이 더 공감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나는 디자인이 아트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많은 시간과 시련을 거쳤다. 아트웍은 디자인이라는 전체 중에 시각적 표현 기술일 뿐 디자인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고난과 고비를 겪으며 경험으로 깨달았다.
디자인은 비즈니스를 전달하기 위한 시각적 설계이고 비즈니스 목적에 부합해야 마켓에서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서사는 비즈니스가 마켓에서 소비자를 이해시키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서사는 관점이다. 서사를 시각적 관점을 서로 맞추는 도구로 사용하면 디자인을 소비자에게 설득하는데 더 수월함이 생긴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트웍 이전의 서사의 철학적 설계가 필요하다.
디자이너의 감각은 중요하다. 디자이너의 감각은 트렌드와 비즈니스의 본질을 담는다. 하지만 감각 못지않게 중요한 게 디자이너의 어휘력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 감각을 어휘력으로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장 기피하는 디자인 리뷰가 수십 가지의 시안을 펼쳐 놓고 '마음에 드는 거 고르세요'다. 물론 이런 방법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항상 이런 방식으로 디자인을 한다면 아마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어휘력을 키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서사가 있는 디자인이란 뭘까?
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요즘 내가 좋아하는 위스키 브랜드 사이에서 서사가 적용된 디자인을 설명하려 한다. 위스키는 오랜 시간을 거처 숙성되어 완성된다. 스카치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된 위스키를 총칭하는 단어다. 반면 일본에서 생산된 위스키는 재패니즈 위스키라고 칭한다. 최근 일본 산토리 증류소의 역사가 100년이 됐다. 산토리 증류소의 브랜드 중에 히비키라는 제품이 있는데 이 병의 디자인이 매우 특이해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병의 모양이 매우 특이한데 총 24각의 면으로 디자인되었다. 만약 디자이너에게 24각의 면으로 디자인 한 의도에 대해 물었을 때 '그냥 이뻐서', '감각적으로 세련되서', '다른 위스키 병과 차별화를 위해'라는 식으로 답한다면 나는 아마 그 디자인에 서사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병을 디자인 한 이유에 대해 서사를 통해 설명하게 되면 나는 그 디자인에 서사를 이해하게 된다. 서사는 관점이다. 서사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서사가 있는 디자인이 더 친근함을 가진다.
왜 24각의 면으로 병 디자인 했을까?
히비키의 24각 면은 일본의 전통적 24 절기를 상징한다. 24 절기는 일본과 중국에서 사용하는 전통적인 계절 구분법으로, 일 년을 24개의 절기로 나누어 계절의 변화를 세밀하게 표현한다.
히비키 24 절기는 단순한 위스키를 넘어서, 일본의 전통과 문화, 그리고 자연과 시간을 존중하는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24 절기는 히비키 브랜드의 철학과 장인 정신을 잘 나타낸다.
디자인을 총체적 서사의 설계로 보는 접근은 디자인 과정에서 전체적인 사용자 경험을 고려하고, 그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용자와 제품, 서비스 간의 깊은 연결을 만들고,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디자인이 단순히 기능적이고 미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용자와의 감정적이고 서사적인 연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디자인의 중요한 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는 왜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의미 있게 설명하지 못할까? 왜 자신의 철학을 기반으로 설명하지 않을까? 내가 디자인 한 조형적 형태는 어디서 왔을까? 그 형태는 무엇을 기반으로 했을까? 왜 디자인의 의미를 묻지 않을까? 왜 디자인 의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커뮤니케이션에 특화되어 진화했다. 수렵채집 시절 고립된 삶에서 농업혁명을 거처 사회를 이루고 생존에 더 유리한 고립에서 공동체로 진화했다. 서사, 이야기는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다. 그 이유로 인간은 스토리를 좋아한다. 공동체 즉, 사회를 위해 재미있고 따뜻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도 그랬으면 한다. 시각적 의견,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디자이너의 생각을 들려줬으면 좋겠다.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서사 없는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