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궤적을 정리하다가...
돌이켜보면 아마 누구나 그렇듯, 내 20대는 방황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어쩌다 친구 따라 선택한 사관학교에서는 4년 내내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는가라는 생각을 지속한 채로 졸업을 했고, 이후 6년 동안 온갖 인간 군상과 사건사고, 그리고 다양한 관계의 역동 속에서 나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했던 시기. 누군가 말했듯 내가 선택한 일들은 어쩌면 저 멀리 40대, 50대가 되어야 뒤돌아볼 수 있는, 아직은 영글지 못한 씨앗을 선택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 나를 형성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우선 아래 글처럼 타인을 통해 일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https://brunch.co.kr/@shepherd-91/17
나를 알려면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최소한 한 번은 되돌아보아야 한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를 살펴보아야 하고 현재를 살펴보려면 과거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내가 나를 딱 떨어지게 정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지난 10년간 남긴 글의 조각을 맞춰보며 그 힌트를 얻으려는 노력을 해본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의 군번줄, 계급장, 그리고 온갖 명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건이 담긴 보물 상자를 꺼내보았다.
몇 개의 USB 그리고 SD 카드.
그 안에 정리된 수 십 개의 폴더를 하나하나 열어보다가 힌트를 얻을 만한, 몇 년 전 과거의 내가 인생의 또 하나의 분수령을 맞이하던 순간에 작성한 글을 발견해 그 글로 나의 000, 인간 탐구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의 인생, 국간사, 영원한 모교
돌이켜보면 학교 생활은 참으로 순탄치 않았다. 나는 다른 동기들만큼 학교 생활을 잘하지 못했다. 성적은 늘 바닥이었고 정해진 규칙에 늘 적응하지 못했으며 불만은 또 엄청 많은 생도였다. 학교 생활 내내 나의 표정은 늘 좋지 않았다. 훈육 위원회에 회부된 적도 있다. ‘ㄷ’ 자로 배치된 책상의 끝에 내가 앉아 있었다. 죄인처럼 잘못을 시인하고 잘하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분명하다고 생각하건대, 교수진과 훈육진은 나를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난 못난 생도였다.
격세지감이 실감 나게 시간은 흘러 지금 나는 6년 차 대위로 만기 전역이 목전에 있다. 잠시 대리 선임 업무를 맡고 있던 차에 얼마 전 생도들이 수술실 실습을 오게 되어 내가 이들의 실습 지도를 하게 되었다. 마취 간호에 대한 이론 교육을 하기 위해 잠시 생도들을 불러 모았고 우리는 작은 교육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단상에 서서 생도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정성스레 화장한 어여쁜 생도들의 눈 밑에 깔린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안타까웠다. 이론 교육은 대강 마치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Q & A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눈망울에 생기가 돈 생도들은 졸업 후의 삶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하나둘 묻기 시작했다. 졸업 후 삶의 소소한 장점부터 군인으로서의 진로, 주특기 교육, 전역 혹은 장기 복무 지원까지 다양한 질문에 나는 정말로 선배다운 모양새로 정성스럽게 답해주었다. 거기에 더해 나는 졸업을 1년 앞둔 생도들에게 꿈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와, 군 의료의 흐름, 우리 학교의 장점 등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앞서 언급했던, 학교 생활을 잘하지 못했던 그 생도가 다 커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사실 상기시켜 보면 졸업 직후 삶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참 많은 요소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나를 억눌러온 학교에서 벗어난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전에 군의관, 환자, 의무병, 의정 장교 등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먼저 존재했던 사람들과 근무하며 의사소통 어려움에 부딪혔다. 한낱 어린 간호장교가 졸업하자마자 주로 함께 일하게 되는 주체는 대부분 전문의를 마친, 군인의 탈을 쓴 의사들이다. 갓졸업한 소위로서 이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오죽하면 의사에게 노티 하는 양식을 달달 외우게 했을 정도다. 나 또한 어느날 맹장 수술을 받고 새벽에 열이 난 환자 발견하게 되어 처방에 따라 이를 보고하고자 전화했다가 왜인지도 모를 욕을 숱하게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더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정글 속에서 나를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은 바로 학교 생활이었다. 나를 강인하게 만들어 진짜 사회에서 지금까지 살아남게 해 준 학교에 참 감사하다. 각종 훈육과 군사훈련, 학업, 실습, 항공 간호, 해양 간호 등 일반인들은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극한의 환경에서 나를 키워내 준 학교에 또 감사하다.
많은 간호장교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역 전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그동안의 삶, 현재, 그리고 인생 제2막 중 특히 많이 생각해 보는 것은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이다. 돌이켜보면 많은 후회가 든다. 학교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볼걸, 동기들과 더 잘 지내고, 더 행복하게 생활하고, 규칙에 순응하며 스승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일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생도 때 겪는 갈등과 아픔은 마치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자유는 박탈되고 오로지 주어진 규칙과 계획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일 년이 쉼 없이 흘러간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간호장교로 만들어진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만들어진 내가 있었기에 졸업 후 병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근무하며 겪게 되는 행복,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다스리고 내 삶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군 의료는 일개 간호장교가 보기에도 심각한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다. 국군외상센터 설립과 민간 의료와 군의료가 교차하는 지점 그 중심에서 간호장교가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지금도 각 중요 보직의 간호장교 선배들이 후배 간호장교가 군 의료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간호장교 역사를 이어가고 학교를 보전하기 위해 후배 간호장교들이 항상 목표와 꿈을 가지고 희망과 행복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장교로서 근무하며 얻은 많은 인간관계와 행복, 성취감으로 가득 찬 나의 삶처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생도들도 각자의 영원한 모교를 잊지 않고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2019년 11월 30일 오후 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