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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부방 나그네 Mar 30. 2024

아기가 커나갈 환경은 생각 안 해요?

아기를 둘러싼 온도차, 변해가는 아내

아가야, 

이 글을 쓰기 전에 꼭 이 얘기를 먼저 하고 싶단다. 절대 네가 생겨서 부담이 되거나 싫은 건 절대 아니란다. 그저 아빠와 엄마는 네가 앞으로 살아갈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여 네가 너무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단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주었으면 좋겠구나.


엄마의 임신을 알게 된 것은 설 명절이 시작되는 바로 직전이었어. 엄마와 아빠는 어찌 되었든 양가 부모님들, 즉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이 소식을 직접 알려야 했었단다. 하지만 전 에피소드에서도 보았겠지만, 엄마는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했기에 준비를 하면서도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지. 본인 몸에 '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도 잘 받아들이질 못하는 것 같았어. 설 첫날에는 엄마의 집인 외갓집에 들러야 했어. 가장 난도가 높은 곳이지.


재밌는 얘기 해줄까? 외할아버지는 늦게 결혼하셨고 40세가 되어서야 '아빠'가 되었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첫째인 엄마를 너무나 애지중지하게 키우셨지만 세대 차이도 워낙 컸고, 두 분 다 고지식한 분들이라 엄마와 자주 '트러블'이 있었어. 한 에피소드로 엄마가 20세 때 첫 연애를 하다가 외할머니한테 '발각'된 적이 있는데, 외할머니께서 그날 펑펑 우셨대. 또 하나는 엄마와 아빠가 예식 날짜보다 4개월 일찍 동거를 시작한다고 말했을 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방방 뛰셨단다. '결혼도 안 했는데 남녀가 어떻게 같이 사냐'는 거지.


그렇기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는 조금 죄송한 얘기지만, 엄마는 친정집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 싫어했지. 


"아... 나 정말 가기 싫어요."


조수석 의자에 기댄 엄마가 이마를 짚은 채 나지막이 말했어.


"여보, 그래도 자기를 많이 사랑하는 자기 부모님이잖아. 그리고 아기가 듣겠다. 어렵더라도 조금 기분 좋게 가는 게 어떨까요?"


"그건 아는데... 자기도 내 마음 알잖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아빠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어. 사실 아빠도 엄마였다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 아빠는 그저 조수석에 있는 엄마를 흘긋 쳐다보면서 차가 신호에 걸릴 때마다 엄마의 손을 잡아주었어. 외갓집은 같은 서울에 있지만 가는 길이 그날따라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어.


'딩동'


"어머님, 아버님, 저희 왔어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온 엄마와 아빠를 반겨주셨단다. 


"그래. 오느라 고생 많았지? 얼른 들어와"


늦은 오후였는데 외할머니는 차례음식을 하시느라 불도 켜놓는 것을 잊은 채 정신없이 요리를 하고 계셨고, 외할아버지는 '백년손님'인 아빠의 등장에 멋쩍게 웃음만 지으시고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셨어. 


"어머님 죄송해요, 일찍 와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오늘 집사람이 몸이 안 좋다 보니 조금 늦었어요"


외할머니는 익숙하다는 듯 걱정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셨어. 아직 사위가 어색한지 부엌에서 돌아보지도 않고 존댓말로 대답하셨지.


"아이고~ 괜찮네요. 음식이고 뭐고 다 만들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밥이나 먹읍시다"


엄마와 아빠는 괜히 멋쩍어서 반찬통에 있는 반찬을 덜어내 식탁 위에 있는 접시에 가지런히 담으며 저녁식사준비를 했단다. 그 식탁에서 엄마와 아빠는 우리 아가의 탄생을 예고할 계획이었어. 물론, 엄마에겐 전교생 앞에서 춤을 추는 것 만큼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말이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외삼촌, 그리고 엄마와 아빠 이렇게 오붓하게 식사를 마쳤어.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과일이 우리 둘 앞에 놓여졌고, 외할머니는 '꼭 다먹어야 한다'라며 무언의 압박을 주며 우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은 슬쩍 자리를 떠서 방으로 도망갔어. 아빠는 더 늦기 전에 빨리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고, 엄마를 쿡쿡 찔렀어.


'지금이라도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엄마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고 입술도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 엄청난 소식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이 엄마의 몸을 거세게 조여 가는 것 같았어. 엄마는 고지식한 부모님이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눈에 훤했을 테고, 그게 끔찍하게도 싫었을 거야. 여자가 아기를 낳는 건 '당연한 일'이자 '자연의 순리'라고 주장하시는 올드한 분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지 상상조차 싫지 않았을까? 


'자기가... 얘기해 줘요'


엄마가 다시 아빠 허벅지를 쿡쿡 찔러가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어. 저런 부담감으로 밥은 제대로 먹었나 싶겠더라고. 아빠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대화의 타이밍을 보아가며 '커밍아웃'을 했지.


"어머님! 먹다 배불러 죽겠어요. 저흰 그만 주셔도 됩니다. 이렇게 좋은 과일은 두 분이 드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죠. 그래야 올해 태어날 손주도 더 오래 보시지 않겠어요?"


외할머니는 일순간 멈칫하셨어. 외할머니는 과일 포크를 손에 그대로 쥔 채 외치셨어. 


"뭐? 손주? 우리 진영이가 애를 가졌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고 경사네. 진영이 아빠, 어디 갔어? 여기 와봐요. 아이고 세상에..."


아빠는 그래도 그 모습이 흐뭇해서 웃으며 엄마의 눈치를 슬쩍 봤는데 엄마는 예상대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 외할머니는 이 기쁜 순간을 참을 수 없으셨는지 외할아버지를 계속 찾았지.


"진영이 아빠 어디 간 거야. 글쎄 우리 진영이 이가 애를 가졌대요!! 우리 큰 아기가 아기를 가졌네"


방으로 들어가셨던 외할아버지도, 방 안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던 외삼촌도 놀라서 식탁으로 달려오셨어. 


"아이고, 아기를 가졌니? 장하다. 그래, 우리 딸 얼마나 고생했니. 축하한다 얘야"


"누나 임신했어? 축하해"


외할머니의 감격의 찬 목소리도, 외할아버지의 울먹임이 있는 축하메시지도, 외삼촌의 놀란 목소리에도, 엄마는 고개를 들 줄 몰랐어. 누가 보면 원치 않은 임신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외할머니는 엄마의 임신 소식에 흥분하셨는지 본인 지인 중 누가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애교가 많다는 둥, 자기도 주변에 빨리 얘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하시다는 둥 얘기를 마구 쏟아내고 계셨어. 아빠는 얘기를 들으며 엄마의 손을 꼭 잡았는데, 엄마의 손은 한가득 땀으로 차있었어. 엄마는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지.


"그게, 생각만큼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일순간 정적이 일었어. 엄마의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외할머니는 말문을 잃은 채 엄마를 바라보았고, 외할아버지도 여전히 손에 잡은 과일 포크를 놓지 않은 채 눈만 꿈뻑꿈뻑거리셨지.


"아기가 커나갈 환경은 생각 안 해요? 얘가 커가면서 져야 할 짐이 얼마나 큰 데, 그저 당신들 기쁜 얘기만..."


엄마가 말끝을 흐렸어.


엄마로서는 어렵게 꺼낸 얘기였지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로부터의 공감은 조금도 받아내지 못했어. 아니 공감 자체가 불가능했지. 그분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이었을 테니까. 외할머니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외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엄마를 쳐다보았지.


"넌 그런 소리 하지 마. 왜 맨날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니. 애가 나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데? 티브이를 봐봐. 임신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지천에 널렸어. 아직 키워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걱정만 하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아기가 살아갈 이 세상이 안전해요? 그렇다고 환경이 깔끔하길 해요? 나중에 얘가 그 많은 노인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까지 있는데, 제대로 클 수 없는 환경이라면 낳는 게 애를 낳는 것 자체가 죄짓는 거밖에 더 되겠어요?"


둘은 식탁 위에서 팽팽하게 맞붙었어. 외할머니도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넌 앞으로 엄마가 될 애가 그런 생각부터 하면 애기한테 안 좋은 영향만 미치지 않겠어? 아주 배 속에 아기가 다 듣겠다!! 어휴. 쟨 어쩜 저러는지 몰라!"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가 거들었지.


"그래 진영아, 여자는 말이여. 결혼을 하면 아기도 낳고 응? 그렇게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거지. 그게 죄짓는 일은 아니란다."


아가야,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이를 안 낳는 부부는 더욱 많아져 출산율이 0.7%대까지 낮아져서 '대한민국이 소멸된다'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야. 오죽하면 2072년에 청년 한 명당 노인이 네 명이나 되는 상황이 온다고 해. 그것뿐일까? 아빠와 엄마때와는 다르게 주변에 아이가 없다 보니 네가 커가면서 너와 함께 놀 친구들이 부족하기도 해. 그리고 학창 시절은 여전히 사교육으로 물들겠지. 엄마는 이러한 미래가 제일 걱정되었던 것 같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된거지.


외삼촌은 참다가 결국 자기 방으로 어슬렁 들어갔어. 아빠는 다툼이 더 과열되기 전에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어. 마치 '저기. 여기 저도 있습니다.'라고 광고라도 해야 했어. 


"어머님, 아버님. 집사람도 애기 걱정이 되니까 그렇죠. 면목없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저희가 제대로 된 집도 없잖아요. 다 제 잘못이 큽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 사진과 청구서를 양가 부모님들께 각 한 부씩 보낼게요.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 성수동 아파트 한 채'..."


난데없이 찾아온 김 빠지는 소리에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리셨어. 그리고 두 분도 조금 욱하는 게 잦아들었는지 앞으로 주변에 너를 자랑할 생각에 한 껏 들뜨셨지. 병원에서 준 너의 초음파 사진을 보여드렸고, 또 너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신기해했어. 그렇게 쏘아붙이던 외할머니도 그날 몇 번이나 엄마에게 축하한다고 얘기를 하셨는지 모르겠어. 여전히 우울함에 빠져있는 엄마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번갈아가며 안아보기도 했지. 엄마는 두 분의 포옹에 미동 조차 하지 않았고, 고개만 숙였어. 그날 밤은 그렇게 흘러갔어.


엄마와 아빠가 너무 지레 겁을 먹은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거야. 이제 막 신혼을 시작한 엄마와 아빠는 갑작스럽게 너를 가짐으로써 생각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걱정도 더욱 커졌으니까. 너를 위한다는 핑계로 우리의 두려움의 원인을 주변 환경 탓으로 돌렸을지도.


집에 들어온 엄마는 피곤했는지 금세 잠에 들었어. 물론 여전히 중간중간에 헛구역질을 해서 아빠가 글을 쓰다가도 달려가서 엄마를 안아주고 토닥거리기를 반복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아빠는 엄마가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오늘 오전만 해도 임신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기 전엔 완전 다른 모습이었지.


"당신 고생 많았어요. 어머님도 너무하시지. 조금 토닥여줄 수도 있었는데. 너무 안 좋은 생각 말고 오늘 피곤할텐데 푹 자요."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에요. 우리 아기도 그러한 아빠를 가질 수 있게 되어서 참 행복한 아이예요. 우리... 우리 아기 잘 키워봐요. 잘자요. (배를 만지며) 아가야. 아빠한테 잘 자요 하고 인사해야지"


아가야.

아빠는 엄마의 배에 익숙치 않은 뽀뽀를 하고, 다시 글을 쓰러왔어. 긴 하루였지?

엄마는 오늘 외갓집에서 보여준 것과 달리 앞으로 더 의젓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거야. 그리고 계속해서 '엄마'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며 성장해 가겠지. 그렇기에 아직은 부족한 아빠와 엄마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주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올 때쯤 더욱 멋진 엄마와 아빠가 되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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