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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잔 Aug 28. 2024

버스터미널에서 소매치기를 잡았다

페루에서 생긴 일-Part 3

유럽이 소매치기의 성지라면, 남미는 강도의 성지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항상 중요한 물건은 몸에 품고 다녔고, 눈이 앞뒤에 달린 것처럼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30여 개 국을 넘게 여행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해본 적도 없었고 강도를 당해본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날의 장면을 보며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스스로 나를 잘 지켜내 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페루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볼리비아로 향할 시간이 다가왔다.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었고, 페루 돈도 조금 남아 있었기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스테이크와 피자로 거하게 만찬을 즐겼다. 배를 두드리며 버스 터미널로 향했는데, 그곳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남미의 버스, 특히 터미널 상황은 예측 불가였다. 공식적인 버스 업체라 해도 출발 시간은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버스 공식 판매소에서의 사기도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조금 더 돈을 지불하더라도 가장 믿을 만한 ‘CRUZE DEL SUR’ 버스를 탔다. 서비스가 좋기로 소문난 이곳은 짐을 안전하게 맡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직원들 또한 친절했다.


짐을 맡기고 K와 나는 터미널 한쪽에 앉아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짐을 맡긴 ‘CRUZE DEL SUR’ 사무실 옆의 로컬 버스 사무실에서 짐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여행객들이 맡겨놓은 짐 중 일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소식에 모두들 당황해하고 있었다.


"우리 짐도 안전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 그냥 우리가 갖고 있는 게 낫겠다."


우리는 재빨리 짐을 찾아와 직접 지키기로 했다. 아직 버스 출발까지 1시간이 넘게 남았고, 우리는 짐을 지키며 교대로 화장실을 다녀오며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터미널에서 지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우리는 의외로 한국인들을 꽤나 많이 볼 수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총 네 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 남자 둘이 여행 중인 팀이 우리 근처에서 버스 티켓을 구매하려고 현지 안내원과 대화하고 있었다. 큰 배낭을 등에 메고 작은 가방은 발 사이에 끼워둔 상태였다.


외지에서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슬쩍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지인이 그들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땅에 앉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그들의 작은 가방 안으로 손을 넣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한국인을 구해야 한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저기요!!! 저 사람이 가방 뒤지고 있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한국말에 놀란 그들은 뒤를 돌아봤고, 나는 현지인을 가리켰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 현지인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더니,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자신의 범죄행위가 들켰음에도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치 내가 자신의 물건을 훔쳐가려고 한 듯, 아주 여유롭게 터미널을 가로지르는 그의 모습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한국인 여행객들도 혹시나 그가 칼이라도 들고 있을까 봐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조용히 가방을 자기들 품에 숨겼다. 몇백 명이 보는 터미널 한복판에서, 경찰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소매치기를 시도하는 그의 뻔뻔함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 후, 그 한국인들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 가방에 운동화밖에 없긴 한데, 도대체 남이 신던 걸 그렇게 훔쳐가려는지 모르겠어요.”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뒤져본 거 같아요. 남미에서는 심지어 운동화도 신경 안 쓰고 다 가져간다니까요.”


강도가 판치는 곳으로만 알고 있었던 남미에서, 소매치기들의 대담함은 의외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우리가 작은 승리를 거둔 셈이었기에 꽤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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