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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혁 May 18. 2024

도시의 아파트와 이웃들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나의 아파트 - 그라노베터의 약한 연결의 힘


1. 아파트와 이웃의 변화


    아무리 집이 편안하고 즐거워도 가끔은 현관문이 굳게 닫힌 우리 집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가족만의 시간도 행복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 DNA에 각인되어 있는 농경사회의 기억은 또 다른 존재를 찾는다. 바로 이웃이다. 이웃의 존재는 우리를 집 밖의 세상과 연결시킨다.

    ‘먼 사촌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낫다’ 혹은 ‘옆집 밥숟가락 개수도 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문화에서 이웃은 매우 가깝고 친밀한 존재이다. 아니 과거형으로 존재였다. 지금 도시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 대부분은 옆집 밥숟가락 개수는커녕 이웃의 이름과 직업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이웃이라는 존재는 언제부터 우리에게 이렇게도 먼 존재가 되었을까? '도시에서 사회학 하기' 답게 그 이유를 도시와 사회의 변화에서 찾아보자. 

    앞서 말했듯,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국민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했던 민족이다. 지금에야 농가인구가 4.3% 정도밖에 안 되지만, 반 세기 전까지만 해도 농가인구는 전 국민의 45.9%나 됐다. 성공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협동이 중요하다. 상부상조, 품앗이, 두레와 같이 협력을 의미하는 우리말은 대부분 농업에서 유래됐다. 이런 농업의 특성상 농경사회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며 마을을 이루고 살아야만 했다. 올해 농사를 망치면 마을 전체가 다 굶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웃은 함께 먹고사는 가족과도 같은 운명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만도 하다.


현저히 줄어든 농가인구


    1960년대부터 대대적인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농경사회는 도시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전국각지에서 일자리와 기회가 넘치는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며 농경사회의 공동체적 가치관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까지는 우리나라 공동체 문화의 명맥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88년도에 아직 아빠 쪽에 있었던(?) 32세 김 씨의 심금을 울린 명작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생각해 보자. 배경은 서울 쌍문동. 세 들어 사는 가족까지 한 지붕에 두 가족이 살기도 하고, 반찬 나눔 릴레이도 하고, 골목에서 이웃 간의 담소가 끊이지 않았다. 동네라는 공간 안에 이웃의 따뜻한 정이 아직 존재하던 때였다. 그런데 이런 따뜻한 동네의 경관을 확 바꿔버린 것이 있다. 바로 아파트의 등장이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정겨운 이웃들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거양식은 누가 뭐래도 아파트이다. 현시점에 우리나라 가구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통계적으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아파트에 살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파트로 뒤덮인 도시의 풍경은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뜨악!'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됐지만, 사실 아파트는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매우 합리적이고 적합한 주거양식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도시의 인구밀도가 폭증하던 시절 주택을 더 빨리, 더 많이, 더 싸게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은 아파트 건설이었다. 그렇게 목동, 강남, 분당, 일산 등 아파트를 중심으로 도시가 개발되며 우리나라는 명실상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콘크리트 벽 하나 사이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공간적으로는 오히려 이웃과 가까워졌지만, 정확히 구분된 세대별 공간과 굳게 닫힌 현관문으로 인해 이웃과의 접촉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심적으로도 멀어졌다. 이웃들과의 관계 변화가 아파트 공화국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점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거처 종류의 변화




2. 그라노베터의 약한 연결의 힘


    이 아파트 공화국에서 이웃과의 관계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그라노베터(M. Granovetter)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 렌즈를 빌려왔다. 이 연재글에서 흔치 않게 2023년에도 논문을 쓰신 현역이시다. 사회학에는 아주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그라노베터는 사회연결망, 그러니까 네트워크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회학자이다. 네트워크 사회학에서는 우리 사회의 개인 혹은 집단 간의 관계 유형과 패턴, 구조를 중점적으로 연구한다. 

    사회학계에서 그라노베터의 이론이 중요한 이유는 기존 사회학자들이 강한 유대감에 기반한 관계 혹은 집단에 초점을 맞췄던 것과 달리, 사소하게 여겨졌던 약한 유대감의 중요성을 발굴해 냈다는 점이다.  그가 1973년에 발표한 논문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에서 그가 주장한 약한 연결 관계의 중요성이 잘 드러난다.


그라노베터와 그의 논문 약한 연결의 힘


    그라노베터에 따르면 연결 관계는 일반적으로 함께 보낸 시간에 따라 유형의 차이를 보인다. 강한 연결 관계는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가족이나 친구 같이 친밀한 사람 간의 관계를 뜻한다. 강한 연결 관계에서는 만남과 소통의 빈도가 높고, 정서적 유대감이 높으며,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서로를 기꺼이 지원해 줄 동기가 충분하다. 한편, 약한 연결 관계알긴 아는데 함께 보낸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지인이나 드물게 만나는 먼 친척 같이 친밀감이 부족한 사람 간의 관계이다. 만남과 소통의 빈도가 적고, 정서적 유대감이 낮아 아직까지는 가벼운 관계인 셈이다. 우리의 상식선에서는 강한 연결로 이어져 우리를 도와줄 동기가 충분한 사람들이 우리 삶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런 강한 연결 관계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바로 동질성이다.


강한 연결 관계인 가족과 친구, 약한 연결 관계인 지인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처럼 우리는 보통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친하다. 같이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행동반경이나 사고방식이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강한 연결 관계로 이어진 집단에서는 공유되는 생각과 경험이 대체로 비슷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만 공유되고 있어 정보의 흐름이 중복될 가능성이 크다. 즉, 강한 연결 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에서는 새로움이 없다! 반대로 약한 연결의 힘은 이질성에서 온다. 비록 친밀감이 부족하고 정서적 유대감도 낮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와 이질적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정보와 혁신의 확산이 원활하다. 약한 연결 관계로 이어진 집단끼리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기 쉽다.

    그라노베터는 보스턴 교외 지역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약한 연결의 힘을 증명했다. 그라노베터는 구직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회 네트워크를 조사하였는데, 그중 16.7%만이 ‘자주(주 2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도움으로 구직에 성공하였다. 한편, 55.6%는 ‘가끔(1년에 1회 이상, 주 2회 미만)’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27.8%는 ‘드물게(1년에 1회 미만)’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구직을 위한 정보를 친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끔 만나거나 드물게 만나는 지인들로부터 더 많이 얻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비슷한 정보를 공유하는 강한 연결 관계보다 이질적인 약한 연결 관계에서 새롭고 의미 있는 구직 정보가 오고 갔다는 것이다! 


A와 C의 약한 연결 관계에서 의미 있는 구직 정보가 오고 간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김 씨는 한국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 씨를 비롯해 김 씨의 친한 대학 친구들은 한국 대학원 입시에 문외한이었다. 그런 김 씨가 한국 대학원 입시에 대한 꿀팁을 전수받은 건, 교통사고로 미국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을 때 옆에 누워있던 한국인 박사 형님으로부터였다. 미국에서 박사 후 연수 중인 한국인 형님을 같은 병원에서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지만, 미국 대학졸업생 집단에서 얻을 수 없었던 정보를 형님과의 약한 연결 덕분에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한 연결 관계는 점접이 없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을 이어주는 ‘다리(Bridge)’ 역할을 한다. 약한 연결 관계가 없으면 우리 사회는 집단끼리 고립된 채 파편화될 것이다. 약한 연결 관계는 고립을 방지하고 사회를 통합하여 우리의 세상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그라노베터의 연구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약한 연결의 힘이다.


A와 B의 약한 연결이 없다면 노란 집단과 초록 집단은 고립될 것이다




3. 아파트와 약한 연결


    이야기가 길었다. 다시 아파트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아파트가 도시의 경관을 지배하게 되면서 정겨운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이웃의 담소가 끊이지 않던 골목은 엘리베이터로 바뀌었다. 훤히 열어놓고 동네 사람들이 쉽게 오고 갔던 대문은 세대별로 굳게 닫힌 현관문이 되었다. 이러한 아파트의 구조로 인해 이웃과의 교류가 과거에 비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농경사회에서처럼 이웃들이 협동해야 상황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경제적 상황에 따라 각자의 직장으로 출퇴근할 뿐이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는 이제 이웃과 관련이 없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더 이상 우리는 이웃과 운명 공동체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아파트 주거양식은 과거 강한 연결 관계였던 이웃을 약한 연결 관계로 변화시켰다.

    이웃과 사회적 접촉을 최소화시키고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아파트의 구조와 각자도생의 주거 문화가 차갑고 삭막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아파트 주거양식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타인과의 교류만큼이나 개인의 사생활을 지키고 싶어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개인의 사생활과 타인과의 교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폐식 삶’를 보장한다는 점이다. 현관문을 굳게 잠그면 세상과 단절된 우리 가족만의 세상이 되고, 현관문을 열면 이웃과 교류할 기회가 부여된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단절과 연결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아파트의 개폐식 삶


    개폐식 삶 속에서 굳게 닫힌 아파트 각 세대는 가족이라는 강한 연결 관계로 구성된 고립된 집단이 되었고, 현관문을 열고 나왔을 때 마주치는 이웃들은 이 고립된 각 세대를 이어주는 약한 연결 관계가 되었다.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사회적 고립은 방지하는 아파트의 개폐식 삶은 어쩌면 이웃  약한 연결의 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주거양식이 아닐까? 이웃의 존재는 좁은 아파트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세상을 넓혀주는 강력한 '약한 연결' 관계인 것이다!


이웃의 존재로 우리의 세상은 넓어진다



4. 도시의 아파트와 이웃들


    지금까지 그라노베터의 약한 연결의 힘으로 아파트와 이웃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파트는 단절되어 보이지만 완전히 고립된 곳은 아니다. 옆집, 아랫집, 윗집에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이웃이 살고 있음은 확실하다. 생각지도 못한 가벼운 인연이 우리 삶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아파트에서 스쳐 지나갔던, 혹은 제대로 얘기도 나눠보지 못했던 이웃이 어쩌면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김 씨가 허접한 주차 실력으로 주차를 시도할 때 아파트 주차장 한편에서 갑자기 나타나 "오라이! 오라이!" 해주신 이웃 아저씨, 귤껍질이 일반쓰레기인지 음식물 쓰레기인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음식물 쓰레기라고 알려주신 이웃 할머니, 늘 반갑게 인사를 먼저 건네주시는 경비아저씨, 내가 요청하진 않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동요를 불러주던 아이 등등. 잘 알지 못하는 이웃들이 나를 돕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이웃 간의 좋은 일보다는 안 좋은 일이 많은 지금, 불난 아파트 전층을 뛰어다니며 굳게 닫힌 현관문을 두드려 주민들의 대피를 도왔던 서울 강서구 아파트 의인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서울 강서구 아파트 의인


    오늘도 우리는 귀가하면 굳게 현관문을 잠그고 고립된다. 하지만 새 아침이 밝고 현관문을 열 때 마주치는 이웃과의 약한 연결고리에 감사하며 친절하게 먼저 인사를 나눠보면 어떨까? 우리 세상이 아파트보다 훨씬 더 넓어질 것이다.     




마크 그라노베터 (1943 - )

    그라노베터는 1943년생 미국 사회학자로 현재 스탠퍼드대학(Stanford University)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프린스턴 대학(Princeton University)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학(Hava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라노베터는 개인과 사회 네트워크, 그리고 사회 제도가 어떻게 상호작용는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해 왔다. 무려 73,097회나 인용된 그라노베터의 논문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은 사소하게 여겨져 관심받지 못했던 약한 연결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강한 유대에만 초점을 맞췄던 느슨한 사회학계에 긴장감을 주었다.

    여전히 현역 사회학자인 그라노베터는 2023년 최근에도 논문을 발표하며 연구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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