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일 때 가장 먼저 넣어야 하는 것은?" 각자의 철학에 따라 스프 혹은 면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김 씨는 개인적으로 스프부터 넣는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둘 다 틀렸다. 물론 우스갯소리이지만 "물"부터 넣어야 한다! 또 다른 질문을 해보겠다. "아침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씻기, 아침 먹기 등등 저마다의 생활패턴에 따라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이든 부엌이든 "이동"해야만 한다! 라면의 물처럼 이동은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임에도 그 중요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아니던, 어쨌든 온 세상은 이동 중이다. 거리를 둘러보면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버스와 지하철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도로 위에는 자동차가 물결처럼 흘러간다.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를 포함해 이동은 끊이지 않는다.
특히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동은 기본 옵션이다. 출퇴근, 등하교, 친구 만나기, 장 보기, 산책 등등 도시에서의 수많은 활동들이 이동을 전제하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이동의 양을 살펴보면 2022년 서울에서는 하루 평균 대중교통 이용량이 944만 건이었다고 한다. 서울의 인구가 940만 명쯤 되니까 하루 동안 서울이 통째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연 단위로 보면, 연간 서울의 대중교통 이용량이 총 34억 건이다. 서울에서는 한 해 동안 세계 인구의 절반 가량이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한 것이다!
코로나 이후 대중교통 이용 건수가 증가했다
이동은 사람들의 시간관념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기도민은 인생의 20%를 이동하면서 보낸다"는 말이 있다. 출퇴근하는 경기도민의 애환을 투영하는 농담이다. 그런데 2023년 경기도 사회조사에 따르면 경기도민이 직장이 모여있는 서울로 출퇴근하는 데 왕복으로 평균 2시간 14분이 걸렸다. 하루에 평균 33분 이동하는 서울 사람들에 비한다면 이런 농담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경기도 고양시민이었던 김 씨에게도 편도 1시간 거리는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경기도민의 거리 감각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이동 현황은 어떨까? 국토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매일 평균 10.3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고, 이동하는 데 2.5시간을 소비한다. 집 밖에서 보내는 일과 중 대략 1/4을 이동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하루 평균 이동 거리로 보면 20-30대는 31.4km, 40-50대는 44.5km를 이동한다. 말이 30, 40km이지 강서구에서 강동구, 즉 서울의 동서 간 거리가 36.78km다. 매일 서울을 끝에서 끝으로 횡단하는 것이다!
국민 평균 이동 시간과 이동 거리 (국토연구원)
여기까지 읽으면서 "저는 집돌이라서 이동이 거의 없습니다."라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이동하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쿠팡. 2022년 쿠팡의 하루 배송 건수는 평균 350만 건이었다고 한다. 야심한 시간 생각나는 야식 배달은 어떤가? 작년 배달의 민족 라이더들 중 가장 긴 거리를 운행한 라이더는 4만 5,380km를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 라이더는 한 해에 지구 한 바퀴(약 4만 2,000km)를 돈 거다. 사람만 이동하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 뱅킹으로는 하루에 75조 원이 이동하고 있다. 대략 현대차 시가총액(43조)에 네이버 시가총액(36조)을 합친 만큼의 어마어마한 돈이다.
주거, 상업, 공업 등 토지의 용도가 용도지역제로 확실하게 나눠져 있는 도시에서 우리의 이동은 필연적이다. 우리에게 이동이라는 행위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그동안 실감하기 어려웠을 뿐 사람, 기계, 음식, 이미지, 정보, 돈 등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이동 중에 있고, 우리의 삶은 이동을 전제로 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라면 끓이는 법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라면의 물처럼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행위인 "이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럴 때 당연하게 여겨지던 일상 뒤의 구조를 탐구하는 사회학의 렌즈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우리 삶의 주연, 조연은커녕 엑스트라조차 되어 본 적 없던 '이동'을 사회학적 렌즈로 살펴볼 것이다. 이동 그 자체가 현대 도시인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이동을 우리 삶의 주연으로 한번 모셔보자!
2. 어리의 모빌리티스
어리(J. Urry)는 그동안 사회학에서 경시됐던 이동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회학자이다. 예를 들어, 최근까지도 계급 격차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에서 경제력,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은 늘 빈번한 주제였지만, 이동 능력에 따른 계급 격차는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런 사회학계에서 비로소 이동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학의 모빌리티 전환(Mobility Turn)을 이끈 사람이 바로 어리이다. 그래서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은 이 연재글에서 다루는 사회학 거장들의 이론들 중 가장 최신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리의 대표작 '모빌리티(Mobilities)'는 이동의 사회학을 집대성한 어리의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저서이다.
어리와 그의 대표작 모빌리티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이동이 존재한다. 통근, 출장, 관광과 같은 사람들의 물리적 이동이 있는가 하면 상품과 자원의 이동처럼 물질적인 이동이 있다. 이런 지리적인 이동만 있는 건 아니다. 책이나 미디어를 통해 안 가본 곳도 가본 곳처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상상적 이동,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지리적 거리를 넘어서는 실시간 가상이동, 그리고 메시지, 문자, 편지 등 정보 전달을 위한 통신 이동도 가능하다.
어리에 따르면 이러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반복되는 이동의 토대가 된다. 예를 들어, 철도로 이동을 위해서는 연결된 철도망, 정해진 요금, 운행 시간표, 철도교통관제의 감시와 통제 등 물리적, 제도적, 사회적 요소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철도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동 시스템은 우리 도시·사회와 무관하지 않다.어리는 대표적인 모빌리티 시스템으로서 보행, 기차, 자동차, 항공이 우리 도시·사회와 어떠한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설명하였다. 이제 어리의 모빌리티스 렌즈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이동을 관찰해 보자.
3. 보행, 철도, 자동차, 비행기
일단 이동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인 보행부터 살펴보자. 사실 보행은 현대 도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위험한 행위였다. 보도가 잘 갖춰지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보행 중 갑자기 나타나는 강도, 들짐승 등 감수해야 할 위험들이 많았다. 여전히 혼자 걸으면 위험한 미국 슬럼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나 현대 도시의 등장과 함께 보행 시스템의 근간인 보도가 정비되었고,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치안 역량이 증대되면서 보행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평등한 모빌리티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
보행은 우리 신체의 역량에 따라 직접 공간을 느끼면서 도시의 다양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다. 아침마다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 명동 거리를 거닐면서 화장품을 쓸어가는 외국인 관광객들,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하는 학생들, 휴식을 위해 공원을 찾는 사람들 등 목적은 저마다 다르지만 보행자는 거대한 경제체제에 편입되고 수많은 사회적 교류를 만들어낸다.
김 씨는 출근길 버스에서 사장님을 만난다. 버스에 내려 회사까지 걷는 시간은 15분 남짓이지만 그 사이에 사장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간다. 사장님은 가끔 회사로 가는 길에 커피나 샌드위치를 사주시기도 한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김 씨는 사장님과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 낸 셈이다.
출근길 보행
보행은 우리의 의지로 걷고 싶은 길을 택하는 자기주도적인 이동 시스템이다. 이러한 보행과 달리 근대화와 함께 등장한 철도는 최초의 기계화된 모빌리티 시스템으로서 이동의 양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철도는 모르는 사람들을 대규모로 이동시키는 대표적인 공공 교통수단이다. 철도는 공공의 이용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모빌리티 시스템이기 때문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거대한 철도망, 운임 요금, 철도법 등 철도 시스템을 갖추려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물리적 시설, 사회적 합의, 제도적 기반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도의 공공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요소는 뭐니 뭐니 해도 시간표일 것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해 뜨면 농사지으러 나오고, 해 지면 집에 가서 자는 게 일상이었다. 각각의 마을마다 통일된 시간이 아니라 고유한 자연시간에 따라 살았던 때이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시계가 보급되고, 표준 시간이 국가적 수준에서 확립되면서 일상생활에도 시계시간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철도에도 마찬가지이다. 대규모 사람들을 한 번에 실어 나르는 것을 반복하려면 약속된 시간표가 필수적이다. 만약 "우리 열차는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운행합니다"라고 안내한다면 누가 제대로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겠는가! 분 단위로 세밀하게 구분된 시간표가 없는 철도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지하철 역에서 공익 근무를 했던 김 씨는 이러한 시간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열차가 연착되어 약속된 시간표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열차의 행방을 묻는 지하철 이용 고객들에게 김 씨는 늘 대역죄인 같이 불쌍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이렇게 정확한 시간표와 시간 엄수는 철도의 확산과 함께 일상적 이동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우리의 이동이 시간에 길들여지게 된 것이다!
철도의 시간표 변경을 알리는 안내문
자동차는 이런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철도를 밀어내고 현대 사회를 대표하는 모빌리티 시스템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이동해야만 하는 철도는 근본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철도와 다른 점은 정해진 시간표가 필요 없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간적 유연성이 있다. 오후 4시건 새벽 4시건 상관없다. 우리의 이동을 위해서 자동차는 주차장에서 24시간 대기 중이다! 먼 거리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자동차는 우리 도시와 사회에 여러 문제도 함께 유발하고 있다.
현대 도시가 가정, 직장, 여가, 소비 등 특정한 용도를 위한 용도지역제에 기반하여 나눠지면서 도시는 자동차 위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활력을 가져다주던 보행로는 줄어들고 타인과의 사회적 교류를 막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는 점점 늘었다. 보행로는 도로에서 주차장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차량의 행렬로 뚝뚝 끊어져 있다. 사람보다 자동차가 먼저인 도시가 된 것이다. 자동차가 점령한 도시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고립, 환경파괴, 자원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차량은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보행로를 침범한다.
비행기는 지금까지 다뤘던 모빌리티 시스템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우선 비행기는 우리가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아니다. 비행기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공항이라는 거대한 모빌리티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공항은 도심과 다소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비행기는 이동을 도시적 차원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연장시키는 중요한 모빌리티 시스템이다. 항공 네트워크가 집중되는 도시는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물류가 이동하면서 일반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도시가 된다. 수도의 광역권 안에 있는 미국 LA 공항, 런던 히스로 공항, 도쿄 하네다 공항, 서울 인천 공항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물류가 이동하는 만큼 공항은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 준 911 테러와 전염병의 세계적 확산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공항은 이러한 위험 발생 확률을 낮추기 위해 고도화된 컴퓨터 프로그램과 감시 시스템으로 통제되고 있다. 여타 다른 모빌리티 시스템과 관련된 법률보다 비행기와 관련된 법률에 의한 처벌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러한 항공 시스템의 고도화된 감시체계가 공항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도 확산되고 있다. 잠재적 위험 요소를 감시하는 CCTV와 이동을 기록하고 추적하는 디지털 기술의 활용은 지난 코로나 사태에서 우리가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상황이다. 도시가 거대한 공항과도 같은 공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서울 광역권과 세계를 연결하는 인천국제공항
4. 이동하는 도시의 도시인
지금까지 우리는 어리의 모빌리티 이론을 토대로 도시의 대표적인 모빌리티 시스템을 살펴보았다. 도시는 이동하고 있다. 도시계획의 결과물인 도보를 걷고, 지하철 시간표에 맞춰 일상을 살아가고, 교통신호와 도로를 따라 운전하며, 다른 세계의 도시로 비행하는 우리는 어느새 도시 모빌리티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이동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모빌리티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 삶에 자율주행자동차, 도심항공모빌리티(UAM), 하이퍼루프 등 새로운 모빌리티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다. 철도와 자동차, 항공 시스템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모빌리티 시스템도 우리 삶과 도시를 변화시킬 것이다.
낙관적인 기술주의자들은 더 효율적이고 편안한 모빌리티 시스템이 우리 삶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리는 모빌리티스의 말미에서 예측할 수 있는 어두운 미래를 언급한다. 우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이동 수단을 대체할 모빌리티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결과, 지구온난화와 자원의 고갈로 인한 전쟁과 파국 엔딩이 있다. 또 하나는 디지털 기술의 진보로 우리의 이동이 감시되고 추적되어 규제받는 빅 브라더 엔딩이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는 속단할 수 없다. 어리의 언급대로 어두운 미래일 수도 있고, 기술주의자들의 생각처럼 밝은 미래일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가로지르고 있는 도시에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동이 좋은 이동일까? 어리는 걷기가 좋은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한다. 도보 15분 거리 내에서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가능케 하여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15분 생활권 도시', 자동차에 점령당한 도시를 구하기 위한 '도로 다이어트'와 '차 없는 거리' 조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는 보행의 중요성을 깨닫고 미래를 바꿔나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이동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여러분이 다가오는 미래의 주인공이다. 오늘 우리의 이동이 미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길을 나서는 여러분, 오늘도 화이팅이다!
도보 15분 거리 일상권에 근거한 파리의 15분 도시
존 어리 (1946 - 2016)
어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영국 캠브리지대학교(Christ's College, Cambridge)에서 경제학 학·석사 학위를,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랭커스터대학교(Lancaster University)의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동안 사회과학계에서 경시됐던 이동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의 모빌리티 전환을 이끌었다.
2016년 타계했지만, 그가 랭커스터대학교에 설립한 모빌리티 연구소(Center for Mobilities Research)에서는 이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고, 그의 영향을 받은 사회학, 지리학, 도시계획학, 교통학 학자들이 왕성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