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눈떠보니 닌자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특히 남자아이라면) 태권도, 검도 등을 다닌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검도와 합기도를 다녔는데, 그래도 검은띠 이후 몇 단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까지 딴 것을 보면 몇 년 이상은 다닌 것 같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 간 후 어느 날, 학교에서 나는 닌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9학년) 수업 중 음악 수업이 있었다.
음악 선생님은 수업을 교과과목처럼 진행하시기보단 거의 대부분을 자유시간을 주었다. 이때에 드럼, 기타 등 연습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가끔 연극 연습을 하기도 했다. 자습 (study hall) 시간으로 활용하며 숙제 등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물론 반 이상은 수업시간 내내 놀고 떠들기 일쑤였다.
학교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음악시간에 나 역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학기 초반이고 흔치 않은 동양인이다 보니 여러 질문 사례를 받는 시기였는데 한 친구가 내게 태권도에 대해 물어봤다.
"너 타이퀀도 (태권도를 미국에선 이렇게 발음한다) 할 수 있어?"
"나는 태권도는 아니고 합기도 (미국에선 아이키도 라고 한다)를 했어."
"그것도 막 벨트 같은 거 있고 그런 거야?"
"응 나는 검은띠야."
검은띠라고 하자 아이들은 "헐 말도 안 돼 검은띠라니 대박"이라며 매우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미국에선 검은띠를 받는다는 것이 엄청 대단한 일이었다.) 한 친구가 내게 기술을 보여달라고 했다. 합기도는 타격보다는 호신술에 가깝고 팔 혹은 다리를 꺾어 바닥에 눕혀 제압하는 기술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짧은 영어로 위험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시늉으로라도 보여달라고 하자 나는 조심스럽게 친구의 팔을 잡고 돌며 유도의 업어치기처럼 친구를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사실 전혀 아플 수가 없는... 그럴 리가 없는 동작인데 이 친구는 생전 처음 경험해서 그런가 자신의 몸이 무언가의 동양무술에 의해 붕 뜬것에 대해 엄청 놀라며 신기해하고, 팔이 아프다고 신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이후 계속해서 내게 다른 것도 보여달라고 했고 나는 손목을 꺾어 제압하는 매우 단순한 기술 (기술이라고도 하기 뭐 한... 매우 단순한 동작)을 보여줬고 이 친구는 더 오버하기 시작했다. (역시 리엑션의 나라인가...)
이후 더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애들은 다 너처럼 검은띠 거나 막 이렇게 기술 배워?라는 질문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넘쳐나는 태권도장을 생각해 "한국에선 대부분 그래"라고 말하였고, 이러한 내 말 때문에 한동안 미국의 순수한 시골마을 친구들의 머릿속에 우리나라는 닌자육성소가 되어 있었다. 다들 점점 나를 이소룡 혹은 재키찬 (성룡)으로 보기 시작했고 질문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럼 무기 없이 막 사람을 죽이고 하는 기술도 알아?" 등 터무니없는 질문에 이게 뭔 소리인가 내가 이해한 게 맞나 하면서도 합기도를 다니며 주워들은 급소 등 부위에 대해 알려주었고 이후에도 몇 가지 기술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음악수업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으로 이동을 했다. 그렇게 몇 교시를 보내고 쉬는 시간에 학교 카페테리아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많은 아이들이 내게 몰려 기술을 보여달라며 이것저것 정신없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닌자스쿨 출신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는데 이게 뭔 소리인가...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싶었다.
알고 보니 나와 친구들이 대화하며 놀고 있는 모습을 음악선생님이 보았는데, 갑자기 내가 친구들을 들었다가 팔을 꺾었다가 하는 걸 보고 선생님도 나를 닌자로 생각한 것이다. 내가 수업을 이동한 이후 수업에 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동양인 학생이 기술로 친구를 공중에 날렸다느니, 항상 이 친구는 특별히 조심해라, 닌자가 왔다 등 이상한 썰들을 풀기 시작하면서 학교 전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졸지에 나는 닌자가 되었고 우리나라 남학생들은 닌자스쿨을 다니는 학생들로 되어버렸다. 이때당시 아직은 영어로 다양하고 긴 설명과 표현을 하기 어려웠던 나는 해명을 할 타이밍을 놓쳤고 그렇게 한동안 나는 닌자가 되었다. 닌자는 일본에서 온 것이지만, 한적한 시골마을 백인 남학생들에게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그 외 아시아 문화를 구분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동양남성은 이소룡과 성룡이 전부였던 이들에게 쿵후, 태권도, 가라테 등 관계없이 무술을 하는 동양 남성은 닌자였다. (심지어 이소룡과 성룡도 닌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나는 에시안(Asian) 닌자 키드가 되었다. 사실 한동안 닌자가 된 것은 매우 좋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더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영어 실력이 빠른 시간에 일취월장했기 때문이다.
CH.02는 미국 고등학교 생활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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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01은 고등학교 입학 전 미국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