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모태솔로가 아니다.
그는 욕망을 알았고, 육체를 가졌으며, 여성과의 접촉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가 회피한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생의 장난감이었다.
세상은 그를 사랑의 실패자로 묘사하고 싶어하지만,
실패는 어쩌면 그가 가장 먼저 자각한 진실의 첫 문장이었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자연의 기만이 숨어 있다는 것을 꿰뚫었다.
우리가 ‘운명’이라 부르며 빠져드는 감정,
그 속엔 종족 보존의 생물학적 의지가 숨어 있었고,
그 의지는 인간의 개인적 행복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였지만, 감각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뛰어난 외모를 가졌고,
여성과의 육체적 관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가 매춘을 찾았다는 기록은 그를 비난하기 위해 언급되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거기서 그의 정직함을 본다.
그는 위선을 싫어했고,
욕망을 포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랑 앞에서 실패했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구조에 대한 환멸 앞에서.
그는 본능과 감정이 만드는 환영을 이성으로 해부했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치열한 생의 해명이었다.
우리는 자주 철학자를 ‘성적 실패자’로 상상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자는,
사랑을 가져보지 못한 자일 것이라 쉽게 판단한다.
그러나 그건 틀렸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그 안의 허무를 맛본 사람이었다.
그의 여성혐오적 언설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 발언들은 그저 증오의 발작이 아니었다.
그건 욕망에 타올랐던 그가,
결국 욕망의 구조를 붕괴시키며 도달한 고독의 철학이었다.
그는 사랑하지 못한 철학자가 아니라,
사랑을 너무 깊이 의심하게 된 철학자였다.
그가 비관주의를 말한 건, 세상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들이민 희망이, 너무 가볍고 가짜였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모태솔로가 아니다.
그는 생을 겪었고, 사랑을 통과했고, 욕망에 무너졌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보다 먼저,
욕망을 바라보는 눈을 얻었다.
그는 고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내면에 과잉된 감각과 사유가 있었기에,
오히려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야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이유는,
아직 그 허무를 끝까지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