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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각... 그 슬픔에 대하여

by 신성규

천재들은 종종 공감각자다.

그들은 사고와 감각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구조를 가진다.

단어를 들으면 색이 떠오르고, 숫자는 표정이 되며, 감정은 공간처럼 확장된다.

그들의 세계는 선형이 아니라, 다층적이며 중첩된 의미의 지도로 구성된다.


나 역시 그러하다.

나는 하나의 자극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여러 형태로 내 안에 퍼진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색으로 다가오고, 어떤 공간은 소리처럼 울린다.

말은 온도로, 감정은 재질로 느껴진다.

이것은 단지 ‘감성적’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이건 신경이 교차되고, 의미가 감각을 타고 흐르는

특이한, 그러나 분명한 존재 방식이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상한 방식으로 세계를 기억했다.

남들은 연도를 외울 때, 나는 그 시절의 공기 냄새와 벽지 색,

그때 들었던 음악의 박자와 햇빛의 기울기를 함께 기억했다.

나는 직선적인 서사를 만들기보다는

연결되지 않은 점들을 감각으로 엮어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러니 내 기억은, 내 사유는, 언제나 입체적이고 정서적이며 미학적이었다.


이런 공감각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자극이 풍부한 층위를 가지기에,

나는 작은 것에서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다.

길거리에 부는 바람 하나에도 선율이 있고,

누군가의 눈빛에 따라 단어의 색감이 바뀌며,

낡은 건물의 외벽에서도 정서적 밀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것을 느끼기에 피로하다.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자극들이 내겐 거대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감정이 빠르게 증폭되고, 타인의 말이나 눈빛에 쉽게 흔들린다.

모든 것이 너무나 의미 있고, 그 의미의 무게가 때론 고통스럽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무표정해진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단절한다.

사람들은 그걸 ‘냉정하다’, ‘도도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는 과잉된 감각의 벽에 갇혀 있는 것이다.


공감각자는 본질적으로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 자들이다.

그 다름은 때로 외로움이 되고, 이해받지 못함이 되고,

끝내는 침묵이 된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를,

감각의 혼재로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내가 느끼는 방식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드문 것이며,

이질적인 세계를 이해하려는 고유한 구조라는 것을.


나는 공감각자로 살아간다.

나는 세상을 색과 온도와 질감과 박동으로 기억한다.

내 사고는 물결처럼 퍼지고,

내 감정은 다중언어로 말한다.


나는 천재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는 방식으로부터

생각하게 되었고,

질문하게 되었고,

표현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공감각을 저주로 보지 않기로 한다.

오히려 이것이 내가 이 세계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단서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너는 예민하다”고.

그러나 나는 말하겠다.

“나는 다채롭게 느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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