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와 불교, 기독교의 구원 공통성

by 신성규

불교와 힌두교의 결정적 차이는

아트만을 인정하는가, 부정하는가이다.

이 짧은 문장은,

동양 사유의 심연을 가장 정교하게 가른다.


힌두교는 말한다.

“그대는 신과 같다. 아트만은 브라만이다.”

이 진아는 우주의 진실, 존재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

깨달음은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이다.


불교는 다르게 말한다.

“고정된 자아는 없다. 모든 것은 인연생이다.”

무아는 ‘부정’이 아니라

‘집착의 해방’을 의미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아트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그것을 의식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각과 반응, 반복된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진아는 개념도, 감각도 아니다.

그저 흔적 없이 지나가는 바람처럼,

존재하지만 체험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고통을 이겨내고 내면을 꿰뚫어본 사람들은

이 아트만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낀다.

그 진아를 인식한 후,

그들은 다시 불교적 길로 들어선다.

즉, 진아를 알되, 집착하지 말라는 무아의 여정이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를 없애는 길이며,

결국은 아트만과 무아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품는 곡선이 된다.


기독교를 보자.

기독교를 관통하는 상징은

선악과와 어린 양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각한다.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이 순간, 인간은 진아를 각성한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과 죄책감, 분리를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친 삶,

즉 어린 양처럼 순수하고 의탁하는 삶은

불교의 무아와 구조가 같다.

“네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나를 따르라.”


이것은 자아의 완전한 해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신과의 합일을 위한 통과의례다.

힌두교가 아트만을 통해 브라만을 만나듯,

기독교는 자기를 부정함으로 신을 만난다.



보편적 인간은

자기 안에 아트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저 생존하고, 흔들리고, 반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존재의 질문을 품은 사람,

내면을 돌아보는 자들은

‘나’라는 중심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중심조차도

마침내 ‘무화’되는 길에 들어선다.


진아에서 무아로,

아트만에서 공으로,

고통에서 해탈로,

고백에서 구원으로.


이 모든 길은 다른 듯하지만

결국 하나의 길이다.

존재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향해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종교를 넘고, 철학을 넘고,

‘인간’이라는 숙제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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