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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an 09. 2018

잠시 숨을 고를 곳

그녀의 대화 습관




오래 보았든 오래 보지 않았든 자연스럽게 내 얘길 털어놓게 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뭐든 말해도 괜찮을 것 같고 뭐든 괜찮다고 대답해줄 것 같은 그런 사람들. 첫 회사의 동료였던 그녀도 그중 하나였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녀는 자신의 얘기보다 상대방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쪽이었다. 매번 정성스럽게 들어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순히 어색함을 깨기 위한 빈 껍데기 같은 질문들이 아니었다. '저번에 그건 어떻게 됐어?', '그 일은 잘 돼가고 있어?'처럼 귀를 기울여야만 나올 수 있는 질문들이 이어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녀 주위엔 위로받고 싶고 격려받고 싶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게 버겁게 느껴질 땐 없어? 매번 묵묵히 들어주는 쪽인 것 같아서. 너도 네 얘길 하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내가 이직한 후, 처음 만난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려던 참이었다. 그날도 새로운 회사는 어떤지, 이사한 집은 괜찮은지 살갑게 말을 건네는 그녀에게 이번엔 내가 되물었다. 



"당연히 있지. 나도 힘들고 답답할 때가 있으니까."



그녀는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최근 있었던 작은 사건에 대해 말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언니와의 일이었다. 둘의 대화는 매번 비슷하게 흘러갔다. 상사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것, 다시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마땅히 옮기고 싶은 자리가 없다는 것. 때론 그 소소한 고민거리들이 일상 전체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언니였다.



"듣는 게 힘든 건 아니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데서 오는 기쁨도 있으니까. 근데 하루는 이런 적이 있었어.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그 언니한테 연락이 온 거야. 그래서 나 너무 힘들다고 답장을 했더니 딱 다섯 글자가 돌아오더라고. 나도 힘들어,라고. 그걸 본 순간, 뭐랄까. 내가 위로받고 싶은 순간도 있는 건데 언니에게 그걸 바라기는 어렵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



털어놓기만 하는 사람과 들어주기만 하는 사람. 어느 순간 그 관계가 습관처럼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들어주기만 하던 사람은 선뜻 털어놓기가, 털어놓기만 하던 사람들은 흔쾌히 들어주기가 어려워진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익숙해진 패턴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녀의 자그마한 입이 다음 말을 찾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얘길 쉽게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토록 조심스러운 그녀이기에 누군가의 말에 그토록 집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주저하기를 여러 번, 어렵게 털어놓은 얘기라는 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의 기로에 서는 우리에겐 그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서로의 얘길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그러다 자연스레 우리의 얘기가 되는 사이. 비록 그 수가 많지 않다 하더라도, 그런 관계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세상에서 잠시 숨을 고를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부 괜찮아지는 날이 있으니. 



서로에게 그런 곳이 되어준다는 건, 어쩌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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