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능 프로그램으로부터
오랜만에 얼큰하게 취한 밤. 요 며칠 마음이 뒤숭숭해 술을 좀 멀리했더랬다. 침울할 땐 한 없이 침울해지는 내 성향을 이제는 잘 알기에 꽤나 굳게 다짐했지만 나와 같은 나이, 같은 일을 하는 사람과 마주할 일이 생겨버렸다. 사람은 비슷한 환경에 처하면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는 건지, 그녀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내가 생각해본 적이 있거나 앞으로 생각할 게 분명한 것들이었다.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간단히 한잔 하자던 자리는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소주에서 막걸리로, 그다음은 입가심으로 맥주. 다행히 술기운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우울하진 않았다. 몽롱한 시선과 달리 저만치 미뤄뒀던 생각들이 점점 또렷해질 뿐이었다. 그때, 그녀가 물었다. 1월의 단골 질문. 새해엔 뭘 가장 하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이렇게 대답했다. 음. 행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거요. 그냥 올해는 되는대로 살아보려고요. 온갖 그럴싸한 결심으로 가득해야 할 1월의 어느 날, 나는 상대방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아무나 돼.
_한 끼 줍쇼 '이효리'
행복에 그다지 목매지 않는 사람과 행복을 어떻게든 붙들어 두려는 사람, 세상에 딱 두 부류만 존재한다면 나는 명백히 후자에 속할 사람인데 그날은 달랐다. 어쩌면 그 이후로 조금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해야만 한다고 어깨에 힘을 줄수록 실망할 일이 늘어난다고 느낀 날도 많았고, 그런 생각들이 모여 올해의 다짐을 슬며시 바꿔놓았다. 어쩌다 보니 내가 행복해져 있네. 그러고 보니 나 요즘 되게 잘 살고 있네. 그런 마음으로 한 번쯤 지내보고 싶어졌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다시 찾아온 2월. 이효리씨가 어느 꼬마에게 건넨 말이 자주 머릿속을 스친다.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사람보다 하루하루 즐겁게 살다 보면 누군가가 되어있지 않을까, 무모하지만 더 살맛 나는 생각을 하며 지낸다. 올해만큼은 행복해지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기. 꿈꾸던 어떤 사람이 되지 못할까 봐 안절부절 하지 않기. 이따금 두 문장을 떠올려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만. 그렇게 일단 1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