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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25. 2020

예상 밖이라 좋은 일

어느 책 속 문구로부터



종종 말썽을 일으키던 허리 디스크가 결국 만성 판정을 받았다. 급한 대로 도수치료 센터를 찾을 때마다 '이렇게 위기 모면만 하셨다간 나중에 큰일 나요' 소리를 들었지만, 금세 까먹어버리기 일쑤였다. 어찌 보면 놀랄 것 없는 진단이었다. 나는 터덜터덜 병원을 빠져나와 가까운 약국으로 향했다. 말끔히 닦인 유리창 안으로 한 약사분이 보였다. 빡빡 민 머리에 검은 뿔테, 가운 안에 큼직한 후드를 입은 중년의 남자분. 전에도 그의 독특한 버릇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진단서를 들고 온 환자들에게 꼭 덕담 한 마디씩 건네는 것, 약값이 3천 원이면 "3천만 원입니다~"해주는 고급 유머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내 손에도 처방전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분은 약봉지와 함께 내게도 덕담을 건넸다.



- 이 좋은 날씨에 왜 기운도 없고 몸도 아프고 그런대요. 나가서 한 바퀴 천천히 돌고 들어가요. 약 잘~먹고, 잠 잘~ 자면 다 좋아질 겁니다요, 수현님~



나는 5천만 원을 내고, 두툼한 약봉지를 챙겨 회전문을 빠져나갔다. 커피 한 잔씩 손에 들고 사부작사부작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햇빛에 따라 붉게 물든 단풍도 구경하고, 아직까진 춥기보다 선선하다 느껴지는 바람을 느껴보았다. 갑자기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나는 근처 카페에 들러 푸짐한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평소 가장 좋아하는 밀크티도 한 사이즈 크게 주문했다. 내 손에는 더 이상 약봉지만 들려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누군가의 선의는
일어설 힘을 준다

_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때때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로부터 긴 여운을 느끼곤 한다.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모르지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다정한 마음을 건네받게 될 때. 그 예상치 못한 따뜻함은 생각보다 오래 삶에 머문다. 별거 아닌 말인데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된다. 그들은 본래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로부터 선한 말 한마디를 들어본 사람일 수도 있겠지. 그건 경험해본 자만이 베풀 수 있는 선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지금껏 내가 나눠 받은 마음을 되돌려줄 기회가 온다면,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순간이라면 더 좋겠다. 이왕이면, 기분 좋은 여운이 그의 삶에 더 오래 머물도록. 나와 같은 오늘을 꼭 경험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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