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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20. 2020

빛 그림자

이른 아침 이 길 위에서 끄적였다.

책 마음이 가을로 드리운 곁의 그림자를 생각한다.  가만가만 그려 봄. 차라리  독백처럼.


스산한 바람이 불어서 가을 같다. 바람이 불어도 해가 오르고 내려도 구름에 가려도 늘 빛을 품은 하늘은 그대로 하늘이 된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겠기에 하늘도 계절도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빛난다. 어떤 무수한 영혼이 하나의 영혼처럼 연결된 하늘 아래 이름 없이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의 삶에 내린 그늘 속에서도 어떤 영혼을 만드는 순간으로 온다. 일방적으로 오는 삶으로부터 먼저 다가가는 순간 그늘도 빛이 되는 것처럼.



하나.


내 그림자를 밟으려고 했다. 내가 한발 걸어가면 도무지 앞서갔다. 보이지 않는 내 분신처럼 하늘에도 없던 그림자가 땅 위를 걸어 다녔다. 어떤 그림자는 따뜻했다. 모처럼 빛이 통한 실루엣이 투명 인간의 휘날림처럼 길게 휘어졌다. 캐노피 유령이 사라질 때 몸이 먼저 날아가고 그 후 연기처럼 사라지던 아지랑이 같은 빛처럼 너울너울 물 깊은 파장 같기도 했다. 내가 멈추면 같이 흔들리던 내 그림자가 웅크리고 가만히 곁에 앉는다. 그러면 나무도 앉아 그늘을 만들어준다. 나무 그림자 서로 모이면 나뭇잎들이 찬란히 흔들린다. 그곳에  바람이 불면 저기로 갔다가 다시 온다. 가끔 그 아래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움직이면 동물들이 나타났다. 그림자도 따라 움직이면 짝을 이뤄 그림자놀이를 하며 하나 되더라. 그러면 두 눈도 빛났다.



둘.


그림자가 서성였다. 갈 길 없는 마음이 얼굴로 숨어들면 얼굴은 차마 가릴 수가 없는 건 어둡다. 어떤 현상이 그늘진 얼굴로 나타나면 나로 인식하는 세계의 언어는 빈약하다. 말이 없다. 맞이하는 방식은 어떤 속마음을 가려준다. 숨겨도 드러나는 현상은 복잡하다. 묵묵히 설명하기 어려운 점은 나날이 깊어져 꺼내놓을 수 없는 마음이 고스란히 그늘진다. 해가 있어도 마음은 음지의 그것과 같이 습해서  해를 앞에 두고 갇힌다. 그늘의 생애 중 어느 한순간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을까. 어떤 진실을 알리고 진실로 갇힌다. 아득히 돌아오지 못할 고백처럼 배회한다. 유일하게 겉도는 그림자의 기억이 결국에는 어떤 생의 일부분을 지워버리는 연습 일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갈구하는 삶의 테두리를 배회하는 한 그 생애 한 번도 이루지 못할 정착이란 소원한다. 어찌 사랑할지 몰라 서툰 요구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생을 기대하고 추측하며 맴돈다. 그 많은 말들을 삼키고 그 많은 소리를 삼키고 넌,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림자라는 이름은 그림을 그린 자, 혹은,  그림을 그려준 자,라고 말한다면 실체는 산산이 부서진 불편한 감정들을 덮는다.



셋.


그냥 내버려 둘 선함과 악함, 그리고 두려움은 친밀함을 지워버린다. 그려낸 것이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어떤 삶이라면 그 안에 우리의 삶이란 파편적인 부분과 부분의 교집합 그 어디쯤 일 텐데, 한가운데를 하얗게 지워버린 그림자의 기억은 오래도록 빛바랜 세계를 떠난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시도 중이다. 밀려드는 불편함과 무례함에 대한 부적절함을 덮어버린다. 금방 사라질 물결이 파도를 이루고 쓸어버린다. 가끔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의도 없는 사실을 사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 심히 왜곡될 땐 도무지 그림자는 떠나지 못한다. 웅크린 기쁨과 웅크린 슬픔을 미처 드러내지도 못한 진심이 불안을 더듬는다. 그늘 한 조각이 뚫린다. 빛이라면 스며들 텐데, 잃어버린 뾰족함이 부드러운 껍질을  뚫는다. 내세울 것 하나 없이 내세운 자부심이 무너진다. 그리고 외면한다. 진짜 그림자의 정체를 착각한다. 감출 수 없는 신화에 대한 해석은 자기를 기만했다. 결과는 참혹하게 그늘진다. 그늘진 마음은 혼자서 온다. 의식하지 못한 우월함이 주는 경고는 난감했지만 분명한 건 착오다. 상실감은 야무지게도 또 다른 그늘로 들어간다. 그늘과 그늘 사이 해가 드는 어느 날 나무 그림자가 서성인다. 그리고 빛났다. 그곳으로 가면 되겠다. 착각이 아니고 상상도 아닌 그곳의 그늘을 지우고, 회복되는 건 존재처럼.


빛 그림자,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저절로 그림처럼 써졌다. 그리고 지켜졌다.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 테고,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그림자는 재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투영되는 것일 뿐 의심은 빛으로 태워버릴 테니까, 나무 그늘 속에서는 그림자도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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