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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고싶은오리 Feb 17. 2023

슬픔이라는 단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슬픔이라는 단어를 가슴 깊이 새겼다.

“오빠”

“생리를 두 달 동안 안 하는데 퇴근할 때 임신테스터기 사가야 될까 봐”

“한 줄은 완전 선명한데 나머지 한 줄은 희미한데... ”

“진짜!! 어디 봐봐 진짜네”

“내일 당장 병원은 못 가니 토요일에 가자”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지 말고 스트레스 절대 받으면 안 된다.”

“눈치껏 알았지!!”     

예민한 성격에 업무 과중이 오면 자주 두통을 호소했던 것을 잘 알기에 남편은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내 걱정 하는 거지?”

“둘 다 걱정하는 거지!!”     


나는 어떨 떨 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아기가 생겼다는 감정이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남편은 아기가 어떻게 될까 봐 회사에서도 힘든 일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 맘같이 되지 않는 일이 회사 일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주말이 왔다. 병원 접수를 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와 상반된 남편은 입가에 미소가 가득 머금은 표정이었다.


“정미숙 님”

“임신테스터기 먼저 해 볼게요”

“축하합니다.”

“마지막 생리는 언제 하셨어요?”

“2월 2일이요”

“아직 아기집은 보이지 않네요”

“2주 후 다시 오세요”     

결혼 후 첫 아이를 임신했다. 결혼하고 아이 갖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아이는 조금 늦게 가지고 싶었지만 석 달 만에 첫 아이가 찾아왔다. 산전 검사도 해야 하는 줄 몰랐고, 피임도 하지 않았다.  덜컥 아이가 생겨 기쁘기도 했지만, 걱정도 되었다. 지금처럼 육아휴직이 당연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시절이 아니라 출산 후 3개월 후 복직했던 때라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직장생활을 계속하려면 3개월 지난 신생아를 부모님 혹은 남의 손에 맡기고, 출근해야 했다. 회사 선배는 쉬는 시간 틈틈이 유축 해서 아기가 먹을 젖을 짜내며 힘들게 아이 키우는 모습을 봐서일까. 아니면 아기 키우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일까 걱정이 산처럼 쌓였다. 과연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고민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남편은 힘들면 회사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이 생기고, 첫 임신으로 인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뱃 속에 아기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임신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에 늘 하던 대로 생활했다. 급여 정산할 때면 신경은 예민해졌다. 숫자 하나 잘못되면 200명의 급여가 틀어져 버렸기에 더 긴장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급여 정산이 끝나고 긴장이 풀어져서일까 아랫배가 살살 살 아프기도 하고 콕콕 찌르듯 아프기도 했다. 적색 혈이 2~3일 계속되었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조퇴하고 남편과 병원을 찾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가는 병원 길은 두려웠다. 처음 초음파 봤을 땐 반달 모양으로 착상도 잘 되고 크기도 1cm 정도로 좋았다. 오늘 초음파로 아기집을 봤는데 모양이 둥글어야 하는데 반달 모양에 주글주글하게 보였다.

“6주 되셨고요. 아기집 모양이 좋지 않고, 착상혈도 며칠째 계속되고 있으니 유산방지 주사를

맞고 약 처방해 드릴게요”

“선생님 약 먹어도 괜찮나요?”

“네, 태아에게 영향 없으니 드셔도 됩니다.”     


내 욕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뱃속 아기에게 정말 미안했다.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왈 꽉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 탈 없이 쑥쑥 자랄 거로 생각한 뱃속 아기는 7주 되었는데도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계류유산 진단을 받았다. 한 달 만에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지켜내지 못한 내가 너무 한심했다. 남편 말대로 회사를 그만뒀더라면 뱃속 아기를 지켜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마취하고 잠시 잠든 사이 뱃속 아기는 멀리 떠났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슬픔이라는 단어를 가슴 깊이 새겼다.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은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여전히 머물러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듯 보이지만 잊히지도 않는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살짝만 건드려도 어느 틈으로 새어 나와 한 번씩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동 매거진 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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