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의 해방

해방 : Emancipation

by 구시안

연휴 첫날의 새벽녘:


남자가 이야기한다.

- 당신은 내 입안의 마지막 물 한 방울이야.


여자가 이야기한다.

- 당신은 아침에 내게 온기를 주는 태양이야.


등에 살들이 엉켜 붙은 심한 흉터를 가진 남자.
1863년 1월 1일.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35만 명 사이의 루지애나주의 노예들은 선택해야 했다.
종속된 채로 북부 군이 해방시켜 주길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자유를 쟁취할 것인가.


목화밭에 뿌려진 삶.
실화를 담은 영화, 《해방》을 보고 있었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영화는 눈앞 현실과 기억 속 상처를 번갈아 보여준다.
태양 아래 드러나는 광활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자유를 향한 주인공의 내면 풍경,
빛과 그림자가 뒤섞이는 순간,
보이는 것 너머의 감정을 읽게 된다.


윌 스미스가 연기하는 주인공은 육체적 억압에서 벗어나지만,
진정한 해방은 그의 내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숲과 강, 햇빛과 그림자는 그의 감각과 심장을 흔드는 시적 장치다.

모든 장면들이 눈으로 빨려 들어 한 동안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말 없는 발걸음,
떨리는 손짓,
침묵 속의 눈빛 하나하나가
자유와 고통,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영화는 보여주지 않고, 느끼게 한다.
해방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동시에 인정하는 순간이다.


주인공과 함께 숨 쉬고, 걸으며
자신만의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묘한 순간.
빛과 그림자가 뒤엉킨 화면 속에서
나는 묻는다. 나의 자유는 언제였던가.

시대의 배경을 떠나

현재를 살아가며 스스로에게

해방되지 못한 것들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연휴의 빛 사이
나는 얼굴을 숨기고 도시의 숨을 듣고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누나가 싸준 음식을 들고

늘 그렇게 반복되는 명절이라는 이름에 서야 하는

고요한 자락에 서있었다.


돌아오는 길:


어느 출근길 텅 비어버린 단골집 카페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발견한 장사를 접는다는 메시지가

투명한 문에 붙어 있을 때, 찰스와 안나를 만났다.


동네 캣맘들의 보살핌으로 겨울을 그래도 따뜻하게 나고 있었다.

길고양이, 찰스와 안나도 어디론가 사라진 걸 보니,

자신들의 따뜻한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 전을 부치고 있을지도 모르지.


차 없는 도로 위,
낯선 간판들의 그림자가 길게 누워 있고
멀리서 문 여닫는 소리는
내 마음속 파문처럼 잔잔히 퍼진다.


담배 연기가 허공을 떠다니고,
그 속에 봄도 겨울도 아닌 계절이 머문다.
나는 그 연기 속에서
조용히 나를 풀어놓는다.

소파에 누워 하루 종일 보고 싶은 영화를 봐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내 안의 방 하나,
불 꺼진 의자와 그대로 남은 내 그림자를 마주하며,
누구도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나를, 그리고 나와 비슷한 고요를 가진 도시를 공감한다.


모든 것이 잠시 멈춘 순간

고요는 무겁지 않고

세상엔 겨울을 서서히 녹이는 봄비가 내린다.

나는 그 안에서 자유롭게 숨 쉰다.


얼굴을 가린 나와
소리 없는 도시 사이,
나는 나의 심장을 내려놓고
그 고동을 듣는다.
그리고 그 박동이
나의 것처럼,
아프게,
빛나게 느껴진다.




명절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혼자만의 고요하고 충전해 주는 시간이었다.
오늘도 나는 그 믿음을 확인하듯
연휴의 종로를 천천히 거닐었다.


책방에 들릴까 하다가,
그냥 걷는 것이 좋았다.
삼청동을 지나
서촌과 북촌을 걸었다.


차 없는 골목은 평평하게 눌려 있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길 위에 앉아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거창한 건 없는
종이 위 먼지처럼,
햇살은 낮게 깔리고,
나는 그 사이를 걷는다.

작고 좁은 향기로운 길을.


삼청동, 돌담 위 담쟁이는
무심하게 오래된 시간을 감싸 안았다.
카페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고요를 흔드는 작은 숨결 같았다.


서촌,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멀리서 문이 스르르 닫히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심장과 맞닿아

파문처럼 퍼질 때면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것을 끄적여 놓고는 주변을

돌아보는 버릇은 여전했다.


북촌의 계단을 오를 때,
나는 잠시 멈춰 앉는다.

엉덩이가 쏙 들어가는 계단의 넓이가

마음에 들고

스쳐가는 자신을 홍보중인 봄이

여기저기 전단지를 뿌리는 듯

그 향기가 좋아서

이 고요가 좋아서

잠시 그렇게 계단에 앉아 신세를 진다.


손끝에 잡힌 연필,
종이 위의 빈 공간,
내 안의 생각은 도시와 맞닿아 부서진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지금의 나를 돌보는 일은

여전히 내가 할 일이라는 고집으로.


이곳에서는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연휴의 도시는 숨을 줄이고,
나는 그 속에서 천천히 나를 느낀다.


발자국 없는 골목,
빛 속 먼지,
담쟁이 그림자,

그리고 나.
서로가 서로를 감싸며
잠시 고요 속에 머문다.


이 고요가 나를 위로한다.
말없이, 설명 없이,
나와 도시가 서로의 호흡을 공유할 때,

나는 진정한 해방을 맞이한

노예처럼
전율처럼

스며드는 따뜻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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