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y 04. 2022

천도교수도공부-바라보기

개벽라키비움-천도교수도공부9

[알리는 말씀] 아홉 번째 이후 천도교수도공부 모임 기록은 모시는사람들-개벽라키비움(네이버카페)로 이동하였습니다.(2022.05.20)

----------------------------------------------------

[편집자 주] 아홉 번째 천도교수도공부모임이 4월 28일(목)에 진행되었습니다. 천도교 수도에서도 관법(觀法)은 중요한 요소중 하나입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앞서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보는 것'인지부터가 문제/과제가 됩니다. 시각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강렬하여서, 대개 명상이나 수련을 할 때는 문을 감고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명상이나 수련을 하다보면,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이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것에 대한 해명이나 깨달음이 필요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더욱이 수련의 최고 단계를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본다'는 것 '바라보기'는 단순한 감각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날부터는 우리의 육관(안이비설신)을 하나씩 짚어가며 수도와 결부 지어 이야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역시 라명재 동덕이 발제하시고, 이날의 장황한 토의 내용을 통섭하여, 종합적인 측면에서 이를 재정리해 주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라명재 동덕의 ‘견성공부론’이지만, 그 안에 이날 이야기들이 모두 녹아 있기도 합니다.



 

라명재 정리 



예전에 걷기 명상에 참여한 적 있다. 그때 천천히 걸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어떤 모습이라도 외면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인상 깊었다.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에 쉽게 유혹되는 요즘 사람들에게 필요한 수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볼 때와 싫어하는 것을 볼 때의 마음이 차이가 나고, 표정에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깃발이 바람에 흔들린다. 깃발이 흔들리는 것인가, 바람이 흔드는 것인가,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가?


마음이 보는 것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하는 걷기 수행은, 일상 중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수련 중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좌로 앉아서 수련하는 것이 다리 아플 수 있는데, 수련시간 후 체조나 운동하며 굳은 몸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때 아픈 감각에 마음을 빼앗기면 수련할 때 가졌던 한울님을 모앙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자기도 모르게 잊게 된다. 그러므로 수련시간 후 쉬는 시간에도 조용히 천천히 걸으며 마음을 잃지 않으며, 걷는 수련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쉬는 시간에도 수련의 연장이 돼야 하고 경외하고 모앙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수심정기다,


“공경이 되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잠깐이라도 모앙함을 늦추지 말라.”(동경대전, 전팔절)


“주문만 외우고 이치를 생각지 않아도 옳지 않고, 다만 이치를 연구하고자 하여 한 번도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또한 옳지 않습니다. 두 가지를 겸해 온전히 하여 잠깐이라도 모앙하는 마음을 늦추지 않는 것이 어떠할꼬”(해월신사법설, 수도법)


애초에 본다는 것은 대상을 보는 것이다. 내가 아닌 밖의 대상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 그것을 보며 마음으로 좋다 나쁘다 예쁘다 밉다 분별하고 마음을 쓴다. 그러나 보는 주체는 누구인가? 대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관점을 돌려보면 대상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된다. 대상을 바라보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내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면, 주관과 객관이 중심을 잡는다.


또한 보는 것은 빛이 사물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사물에 빛이 흡수되거나 반사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스텔스 기술의 원리다. 그럼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인가? 또한 사물을 보이게 만드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빛이다. 빛은 무엇인가? 밝음이란 어두운 무명을 깨우치는 진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물의 반사되는 빛이 아니라 빛 자체, 즉 진리를 보려해야 한다. 


“밝음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거든 멀리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동경대전, 전팔절)


그러나 빛은 어둠과 함께한다. 보이는 게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도 있듯이.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보며 없는 것도 같이 볼 수 있어야 하고, 화려한 꽃을 보며 꽃을 피우기 위한 생명의 노력과 꽃이 지고 시드는 것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뜰 앞의 푸른 버드나무를 한 번 보자. 버드나무가 처음 생길 때에는 어린 싹에 불과했지만 따스한 햇볕과 봄바람의 기운을 받으면 줄기가 크게 자라고 잎이 온 뜰을 뒤덮는다. 단지 줄기가 크고 푸른 잎이 뜰을 덮은 것을 보고 본래 그 버드나무의 주체가 이런 줄 아는 사람은 버드나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리고 작은 싹인 주체가 햇볕과 봄바람의 도움을 바탕으로 하여 이렇게 충건하게 자란 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푸른 버드나무를 바로 아는 사람이니라”(의암성사법설, 대종정의, 오교의 요지)


그 보이는 것 너머, 생명이전의 근원을 공부하는 게 성품공부다. 이때는 빛을 가급적 차단하는 게 좋다. 저녁에 밝은 빛에 노출이 많으면 잠이 잘 안 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깊은 내면에 침잠하기 위해서는 조용하고, 어두운(안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감각의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것이 도움 될 수 있다.


보는 것은 주관적이다. 자기가 아는 만큼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관심 있는 것만 본다. 때문에 같은 사물이나 사건을 똑같이 봐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수련을 하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수련은 마음이 내 몸 안에 갇혀 있던 것을, 나를 간섭하고 있는 모든 외유기화로, 한울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 모든 한울과 만나고, 그 모든 한울의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다시 보게 된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청수를 모시고 기도를 해도 그저 맹물일 뿐이었는데, 어느 날 그 물이 내 안의 나를 살리는 생명의 물로 보인다. 내 안의 물과 그릇안의 물이 경계가 사라져 하나가 된 것이다.


예전엔 범연히 지나던 꽃이 생명을 발산하는 한울로 보이고, 지저분한 청소차가 내가 더럽힌 한울을 깨끗이 하는 한울로 보인다. 집안이 어지럽혀져 있고 개수대에 그릇이 쌓여 있어도 자기일이 아니니 관심 없이 지나던 게 내가 어지르고 내가 먹은 그릇이니 내가 깨끗이 닦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든다. 그 모두가 한울을 위하고 한울을 돕는 것이므로.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면 타인과 다른 생명의 마음과 고통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게 된다. 새로운 눈, 한울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남들이 못 보는, 우리 눈의 한계를 벗어난 미시적 거시적인 것을 특출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못 느끼고 보고도 몰랐던 참 모습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련을 통해 내 마음이 확장되면, 보고 듣는 모든 감각의 차원이 변화하고 관점이 달라진다. 나의 눈으로만 보고 느끼던 것을 상대의 눈으로, 여우의 눈으로, 나무와 풀의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의 눈이 열리면 세상을 보다 다차원 적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보던 일방적인, 표면적이고 표층적인 세상을 보다 바르게 보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한울님의 눈으로 보고 듣는 정시정문의 심법이다.


“지나간 옛 현인과 철인이 스스로 구하고 스스로 보이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으나, 우리 도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스스로 구하여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이 반드시 바르게 보이고 바르게 들으니, 만에 하나도 의심이 없느니라.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듣는 것은 성․심․신 삼단이 합하여 보이고, 나누어 보임이니 세 가지에 하나가 없으면 도가 아니요 이치가 아니니라.”(의암성사법설, 무체법경, 신통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