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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9. 2019

개벽과 글쓰기

-개벽통문-028

개벽이 나로부터의 개벽이라면, 그리고 개벽을 묻는 것이 곧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일이라면, 구체적으로 개벽은 어디서부터,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는가? 


나로부터의 개벽이란, 구체적으로 나만의 콘텐츠를 갖는 일이다. 개벽하는 것은 새로워지는 것이고, 새로워지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란 본래 상태에 새로운 정보를 입히거나 낡은 정보를 삭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세계의 전체 정보량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일이다. 개벽하지 않아도 그 일은 일어나지만, 개벽함으로써 내가 생산하는 그저 망망대해에 한 방을 물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빛을 다르게 하고, 새롭게 하고, 하늘에 비치는 바닷빛살을 맑고 푸르게 하는 것이 개벽이다. 비유를 걷어내고 말하자면, 현존 세계의 정보를 짜깁기/소모(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정보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여 묻혀진 의미를 발굴하고, 잊혀진 의미를 재생하고, 불임(不姙)의 의미 접합을 극복하고 새 생명을 잉태시키는 합궁(合宮)에 성공하는일, 그리고 창의적인 발상을 더하여 이 세상의 지혜와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데 이바지하는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나만의 콘텐츠를 갖는 가장 오래된 방법,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글쓰기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로 글쓰기란 단지 머리를 쥐어 짜내며 글자 수를 늘력가는 일이 아니라, 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를 포함하는 종합적인 일이며, 또한 그 각각에 내포되는 되먹임 구조이며, 내유-외유가 통섭되는 관계-구조의 작용이다. 이런 이유로 글쓰기는 말하듯이 하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고, 그러므로, 쉽게, 좋은 글을 쓰는 요령이 바로 말하듯이 쓰는 것이다. 또 좋은 글을 잘(쉽게) 쓰기 위해서는 읽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듣기는 읽기의 다른 방식이다(오늘날, 오디오북을 생각하면 쉽다). 이처럼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는 모두 쓰기로 환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영역(말하기, 듣기, 읽기)으로 환원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은 글쓰기의 방식도 다양화하고 있다. 펜(볼, 연필)으로 원고지에 쓰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며, 컴퓨터로 쓰는 것을 넘어서, 스마트폰의 글자판을 '눌러쓰기'가 점점 그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종일 SNS의 글자판을 누르고 있는 모습을 거리에서 너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점점 책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이 태산같고, 책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가 줄줄이 문을 닫거나 서점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객관적인 지표에도 불구하고, 통계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이 읽고(스마트폰), 또 많이 쓰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말하고, 듣고, 읽고, 쓴다는 개념이 달라진 시대이다. 


읽기와 쓰기의 개념이 달라졌을 뿐. 말하기/듣기를 포함한 읽기/쓰기는 펄프종이나 디지털종이 위에서 활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스타그램과 같이 이미지 중심의 쓰기/말하기 - 읽기/듣기를 넘어 최근 가장 급격한 영향력 상승 추세를 보이는 것은 유튜브라고 하는 동영상 기반 미디어이다. 태극기부대를 가동시키는 여럿의 '극우 유튜브 채널'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결코 능동적인 읽기/듣기를 하지 않던 연령대의 사람들(노년층)도 적극적으로 유튜브를 시청하고, 거기에서 자기 논리를 강화시켜 가고 잇다. 그 진위 문제나, 그에 따르는 폐해, 부작용은 추후의 문제이고,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말하고/듣고, 읽고/쓰기를 자기 삶의 일부로 하는 시대가 되었다/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읽기와 쓰기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큽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때에 '자기 콘텐츠'를 갖는 것의 중요성도 더불어 그만큼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자기콘텐츠'를 갖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주로 '한 분야의 박사'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의 달인" 같은 명인이 됨으로써, 사회적으로 '박사'로 인정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특히 정신적인 풍요와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콘텐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 부문의 콘텐츠에 전문가, 달인, 명인, 박사가 되면 그 수준에서, 다른 부문의 콘텐츠의 전문가, 달인, 명인, 박사와 이야기할 수 있다. 초등학교만 졸업했더라도, 자기 콘텐츠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서 강의한 저명한/실력 있는 교수와도 얼마든지 토론할 수 있다. 일찍이 포정이 임금님 앞에서도 자기의 도를 당당히 이야기하여 가르침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원리에서다[cf. 포정해우, 庖丁解牛]


사회가 거의 무한대로 복잡해지고, 알아야 할 지식의 총량이 역시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 오늘날, 아무리 한 분의 박사라 하더라도, 다른 분야/부문까지 다 알 수는 없다. 오히려 한 분야의 (공식적인) 전문가일수록, 다른 분야의 실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고, 한마디로 세상 물정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학위나 ''증"으로 '박사'가 모든 부문에서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용인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러한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위를 용납/인정하지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박사라도, 자기가 노는 마당에 가면 펄펄 날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라도, 어리숙하고 미숙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얕잡아 볼 일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하나를 안다고 해서, 둘이나 셋, 혹은 그 너머 열한 번째 소식까지 다 잘할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나대다가는 곤욕을 치르고 망신하기 십상인 것이 오늘의 세계이다. 


자기 콘텐츠를 가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이다. 여기서 글쓰기는 가장 좁은 의미,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글쓰기를 말한다. 그 글을 쓰는 것이 종이 위일 필요는 없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글쓰기를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다시 말하자면, 글을 쓰기 위해서, 또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콘텐츠를 갖기 위해서는 읽기, 말하기, 듣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읽기-말하기-듣기'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독서토론이다. 하나의 텍스트(그것이 꼭 '책'일 필요는 없다)를 공유하고[따로 또 같이 읽고], 그것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것이 '말하기-듣기'이니 말이다. 글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잘 쓰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글을 함께 쓰는 일이다. 혼자쓰기는 일기로 그칠 분, 자기 콘텐츠 갖기로서의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독서토론과 연계해서 말하자면, '말로서 쓴 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좁은 의미의) 글쓰기이다. 그렇게 글로 써 본 것은 대체로 '내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자기 콘텐츠를 갖지 않고도,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딴지를 거는 것을 기막히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울 가본 놈이 서울 안 가본놈에게 진다'는 말처럼, "말로는 이길 수 없다"고 돌이질을 치는 순간이 올 때가 많다. 그렇게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한마디로 '그저먹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지혜롭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아가는지를 묻는다면, '글쎄올시다!'이다. 그 자신은 '자기만족감'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옛날이야 '빈 수레가 요란하다'며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오늘에는 그처럼 '말 잘하는 놈 - 처세술에 밝은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말 잘하는 놈'이 자기 콘텐츠가 풍부하기까지 하다면, 지금의 그가 성취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그는 약빠르게 살 때보다 높은 지위나 풍부한 물질적 부를 성취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이 세계를 위하여, 그리고 그 자신의 '무궁아'를 위하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성공(=공을 이룸)'을 거둘 것이다. 


자기 콘텐츠를 갖는다는 것은 단지, 남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이야기꺼리를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말하자면, '소재주의'에 머물고 만다. 진실로 자기 콘텐츠를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거창하게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란 '철학자들에 대한 지식'이나 '철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고유의 시각(시점)을 갖는 일이고, 그것으로써 세계를 바라보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 표현은 말일 수도 있으나, 그것을 글로 써냄으로써 체계화와 영구성, 그리고 책임성과 '공공성'(함께 더불어한다는 의미에서의)을 가짐으로써, 그 '시각'이 '독선'이나 '선입견'으로 빠지거나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데까지를 의미한다. 그렇게 자기 세계관/철학/시선/시야에서 나온 글은 설령 좀 투박(?)하더라도 '좋은 글'이 되고도 남는다. 


그것이 내가 <독서공방>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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