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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10. 2019

개벽세상의 꿈, 그리고 보은취회

[이 글은 <개벽신문>제85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신 채 원 | 보은취회 추진접주, 본지 편집위원


[필자 주] 지난 6월 8일, 제 21회 126보은취회 행사의 일환으로 토크쇼 개벽톡톡 <개벽세상의 꿈, 그리고 보은취회>가 진행되었다. 원불교사상연구원 조성환 박사와 필자(신채원)가 진행한 이 토크쇼는 올해 보은취회의 메인 행사이기도 했다. 최근에 등장한 ‘개벽파’가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내년 2020년에《개벽》 창간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개벽이라는 주제와 보은취회는 잘 짜여진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되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신채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제21회 126보은취회 세 번째 날을 맞이합니다. 날씨가 참 좋네요. 오늘은 조금 특별한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보은취회에서 가장 야심차게 준비한 순서이기도 합니다. 요즘 동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굉장히 핫한 키워드로 주목받고 있는 ‘개벽파’의 중심에서 누구보다도 큰 화두를 이끌어가고 있는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조성환 박사님을 모시고 개벽톡톡 <개벽세상의 꿈, 그리고 보은취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성환 반갑습니다. 저는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사상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개벽으로 다시 보는 한국 근대”가 연구 주제입니다. 작년에 <<개벽신문>>에 쓴 글들을 모아서『한국 근대의 탄생』이라는 책을 냈고, 거기서 ‘개벽파’라는 말을 소개했습니다. 보은취회에는 박맹수 선생님의 소개로 5년 전쯤에 처음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신채원 네, 지금은 원광대학교 총장님으로 계시는 박맹수 교수님께서는 조성환 박사님을 “당신에게 하늘이 내리신 선물과 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시는 일들을 생각하니 후배 연구자로서 발자국을 큼지막하게 남겨주고 계셔서 든든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먼저 개벽톡톡은 학술대회나 토론회, 강연의 성격보다는 무겁지 않은 대화를 통해 개벽을 꿈꾸는 자리였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꿈, 희망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면 어떤 상상을 주로 하시나요?


조성환 제 연구주제랄까요, 개벽이라는 키워드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 희망이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세대에서 다 할 수 없으니 다음 세대들이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부터 원광대학교 이병한 교수가 개벽세대를 기르는 “개벽학당”을 열었는데, 저로서는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꿈은 이곳이 수많은 젊은이들로 채워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채원 이병한 선생님에게도 하늘이 내리신 선물이 빨리 나타나기를 빕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각자의 삶의 방향이 조금 다를 뿐, 행복한 상상들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꿈이나 희망이라고 부르고 그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보은취회는 ‘척왜양창의’, ‘보국안민’의 기치를 세웠다는 점에서 이전에 있었던 집회들과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 배경으로 볼 때 보은취회는 어떤 개‘ 벽’이었나요?

조성환 동학 전체가 개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박맹수 총장님께서 “보은취회와 최시형”에 관한 논문을 쓰셨더라고요. 보은취회는 김연국, 손병희와 같은 동학의 지도자들이 최시형에게 찾아와서 “관리들의 압박이 심해서 각 포의 교인들이 장차 모두 죽게 되었으니 불쌍한 이 생명들을(哀此生命) 어떻게 유지하고 보전하겠습니까?”(<<시천교종역사>>)라고 호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박맹수, <1893년 동학교단의 보은취회와 최시형의 역할>) 여기에서 “애차생명”이라는 말은 보은취회가 일종의 ‘생명운동’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시작된 민중운동이었던 것이죠. 옛날에는 임금이나 사대부들이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했는데, 보은취회에서는 민중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스스로 지키려고 일어났다는 점에서 개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의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고, 동학의 생명개벽사상이 사회운동으로 표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채원 오늘날의 보은취회가 기치를 내걸고 가장 큰 가치를 담고 있는 단어가 바로 지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입니다. 생명과 사람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자는 취지에서 해마다 보은취회를 이어 왔습니다.


조성환 5년 전에 처음 와서 놀랐던 것은 동학이 지향했던 정신이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각자 식사를 자율적으로 챙겨 먹고, 자신의 재능을 모두와 나누는 것이 생명의 원리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윤노빈과 김지하 선생이 생명의 본성은 자율과 협동이고, 동학은 그런 생명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한 민중운동이라고 해석했는데, 보은취회에 와서 실제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채원 여기 지금 계신 분들은 동학을 연구하신 분도 있고, 천도교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동학에 대해 낯선 분들입니다. 최근 동학을 다룬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는데, 혹시 드라마 ‘녹두꽃’ 보신 적 있나요?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1894년, 그리고 그 이전에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보은취회를 떠올렸는데, 그들이 꿈꿨던 “사람이 하늘인 세상”이 드라마에서라도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주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오더라고요. 공중파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 장면을 보면서 시대가 바뀌긴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것 역시 개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벽’이라는 말을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조성환 먼저 동학을 모르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보은취회는 126년 전의 촛불집회”라고 설명하면 쉽게 이해될 것 같습니다. 촛불혁명이 있고 나서 동학을 말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성공사례가 생겼으니까요. 그전까지는 동학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촛불혁명은 서구 민주주의나 전통 유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니까 동학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삼일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오늘날 촛불혁명으로 재현되었다고 해야 설명이 되니까요.


드라마 ‘녹두꽃’에서 주문을 외우는 장면이 나왔다니 충격적입니다. 1974년에 김지하 시인의 친구인 윤노빈(1941~) 선생이『 신생철학』을 냈는데, 뜻밖에도 주문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동학의 시천주와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을 비교하면서, 두 기도문에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철학적 키워드가 다 들어 있다고 하면서요. 그리고 본문에서는 동학의 시천주 주문을 생명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에 김지하 시인이 <인간의 사회적 성화>(1984)라는 글에서 다시 동학주문 이야기를 꺼냅니다.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글이 전부 시천주 주문을 생명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자신의 동학 스승이라고 했던 윤노빈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킨 셈이죠. 그리고 1989년에 장일순 선생을 중심으로 <한살림선언문>이 나옵니다. 김지하 시인도 참여했습니다. 윤노빈, 김지하, 장일순은 모두 원주에서 활동했고, 동학의 생명사상을 사상적 원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주의 개벽파”, “원주의 생명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모두, ‘개벽파’ ‘개벽학’이라는 인식이 있기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개벽’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Great Opening”이나 “Great Transformation”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은데, 저는 우리말로는 ‘새길’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시에는 서구를 지향하는 개화의 길이 있었고 유교를 고수하는 척사의 길이 있었는데, 동학은 제3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그것을 ‘개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개벽은 새로운 사상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것을 민중들이 스스로 만들어 갔다는 점에서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근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개벽은 “열려 있는 마음, 깨어 있는 정신, 개척하는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폐쇄적인 마인드에서는 새로운 차원이 열리지 않습니다. 정신이 식민지상태에 있으면 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과 정신이 있다고 해도 악습을 끊는 실천이 없으면 개벽은 불가능합니다. 최제우 선생은 득도하자마자 노비 두 명을 해방시켰습니다. 그것은 전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신채원 ‘새 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드리자면, 근대가 꿈꾼 개벽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나아갑니다. 근대와 개벽, 개벽과 근대에 대한 담론들에 있어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올려야 할 사상적 기반은 무엇일까요?


조성환 개벽은 새 길을 지향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벽에 부딪혔을 때 종래와는 다른 방법, 다른 시각, 다른 틀을 모색해 보려는 노력 그 자체가 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서구적 근대라는 시스템이 한계에 부딪힌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과거의 동학이 그랬듯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모색해 보려는 ‘다시 개벽’의 사상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 사상적 기반은 ‘하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의 모든 가치는 ‘하늘’이라는 말로 압축되었습니다. 새로운 하늘을 여는 것이 새 길이니까요. 1910년에 나온 <<천도교회월보>> 창간호에는 “내 마음과 기운을 하늘같이 한다”[天我心, 天我氣]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늘이 동사로도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이런 용법은 중국철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단히 한국적이고 동학적인 용례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하늘화하려는 성향”, 바로 그것이 동학과 개벽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채원 ‘근대’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저도 근현대사 베이스의 연구자다 보니까, 그런 공간적 배경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서구적 근대와 우리의 근대는 주어 자체가 다른데, 이것을 그냥 같은 시공간 속에서의 ‘근대’로 볼 때 오류가 발생하는 거죠. 서구적 근대와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달랐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조성환 서구적 근대는 우리가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를 생각하면 쉬울 것 같아요. 그것을 먼저 한 것이 일본이었습니다. ‘근대’는 서양사에서 시대 구분을 하기 위해서 나온 말인데, “지금과 가까운 새로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modern은 새롭다는 뜻이니까요, 서양인들이 중세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를 모던이라고 한 것이지요. 그 새로움은 대개 산업혁명, 시민혁명, 자본주의, 과학혁명, 정교분리 등으로 열거되고 있습니다. 모두 서양의 중세와는 다른, 그러나 오늘날과는 가까운 새로움들이지요.


그래서 만약에 오늘날 우리가 이 ‘근대’라는 말을 가져와서 우리 역사를 서술하려 한다면, 조선과는 다른, 그러나 지금과는 가까운 새로움이 시작된 시기를 근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점은 아무래도 동학이 되어야 하겠지요. 물론 서구문물이 들어와서 시작된 새로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화적 근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동학은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스스로 새로움을 창조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개화적 근대와 대비시켜 개벽적 근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개화적 근대에만 주목하고 개벽적 근대는 ‘근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876년 개항을 한국 근대의 시작이라고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고요. 하지만 요즘은 학계에서도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 나름대로의 ‘근대’의 기준을 설정해 놓고 보면, 한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본은 개화적 근대를 했고, 우리는 개벽적 근대를 한 것입니다. 일본은 개벽적 근대가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일본 근대에 민중혁명이 없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일본이 우경화 되는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더 이상 개화적 근대가 아시아에서 우위에 설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것이 인류의 미래가 될 수도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지자, 달리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개화적 근대도 답이 아님을 알게 되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개벽’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각에서 ‘다시 개벽’ 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외면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지향했던 개벽의 꿈은 역사 속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폭발한 것이 촛불이고, 다행이 촛불이 성공사례가 되어서 개벽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개벽을 재발견하는 것은 우리 안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민지라는 정신적 트라우마, 개화적 근대에 대한 열등의식을 해소하고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 개벽이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저는 동학과 개벽은 우리에게 부채이자 동시에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으로 시작된 개벽운동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고,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식민지 근대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채원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조금 와 닿는 것도 같습니다. 동학을 사상으로 접근할 때 주목해야 할 키워드가 ‘하늘’과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동학에서의 ‘하늘’은 어떤 의미이고, 그것이 오늘날 장일순 선생으로 이어지는 생명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조성환 동학을 이었다고 하는 한살림운동은 농약에 의해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 시작되었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 생각이 동학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에서 하늘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주가 생명 그 자체니까요. 그런데 이 생명은 전체이면서 부분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이지만 우주라는 전체 생명체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 개체생명과 개체생명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동학식으로 말하면 나는 ‘하나’의 하늘이면서 우주라는 전체 한울의 일부분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하늘은 우주라는 한울과 이어져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개체의 하늘은 전체의 한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이 점에 주목하신 것 같습니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은 생명체 하나 하나에 우주라는 전체 생명체가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동학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산업사회에서의 인간과 자연의 단절 문제를 극복하려 하신 것 같습니다.

신채원 최근 ‘개벽파’의 발견은 한국철학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 것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보은취회가 자생적으로 20년을 이어 왔는데, 보은취회의 개벽에 대해 기대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조성환 하나의 운동이 20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동학이 가치의 기준으로 삼은 생명은 자율성과 협동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체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는 각각의 부분이 자율적으로 작동되면서 서로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제가 보은취회에서 느꼈던 것도 이런 자율성과 협동성입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자율적으로 자기 재능을 기부하고 자기가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합니다. 동시에 보은취회라는 전체 행사를 위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동학식으로 말하면 각자의 하늘이 전체의 한울과 어우러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민주적이면서 공화적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사회가 동학이 꿈꾼 개벽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부분과 전체가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을 알고 싶은 분들은 보은취회에 가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보은취회가 실천하고 있는 개벽의 이상이 한국사회에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채원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보은취회 3일차의 개벽톡톡 이야기손님으로 와 주셨는데, 120여 년 전에 여기에 오신 분들이 들살이를 한 것처럼 우리도 여기서 짧지만 들살이를 경험하며 공동체의식을 회복하고 함께 사는 삶의 가치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선생님도 들살이 한번 해 보실 생각 있으세요? 여기서는 별도 더 잘 보이고 밤이면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 참 좋은데.


조성환 막내가 아직 어려서(웃음). 내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참여하겠습니다.


신채원 지금까지 함께해주신 모든 분들의 마음 속에 개벽의 불씨를 하나씩 안고 가실 것 같습니다. 내년의 개벽이 더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 내년에도 함께 해 주실거죠? 고맙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저의 하늘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하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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