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파선언>을 읽고(5)
[편집실 주] 이 글은 '개벽학당' 마지막 수업 시간에 '개벽파 선언'을 읽은 소감을 발표한 글입니다. <개벽신문> 제88호(2019.9)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비움 (유채운)
대학공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가 없었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과제에는 학사경고를 받지 않을 정도로만 시간을 들였다. 대신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거나 꽹과리를 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학교는 교육권 문제로 진통을 앓았다. 시간제강사를 자르고 학과 체제가 학부 체제로 편입되어 가는 동안, 강의의 수는 축소되고 교육의 질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유서 깊은 정치학과가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폐지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에 대한 결과는 온전히 학생들이 짊어지게 될 터였다.
보다 못한 학생들은 교육권 보장을 위한 행동에 나섰다. 나는 깊이 관여하지 않고 멀찍이 서서 지켜보았다. 가끔 단체행동이나 문화제를 할 때, 군중의 한사람으로서 머릿수를 보태주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다.
학교는 임박한 전환의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알려주기는커녕, 지지부진한 갈등을 일으켜 학생들의 진을 뺐다. 그렇다고 학교 수업이 유익한 것도 아니었다. 1학년을 위한 전공과 교양 수업들에서 지적인 자극을 얻을 수는 없었다. 사회학은 한국사회가 지닌 구조적 문제와 원인을 밝히는 데 유용했지만, 비평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지루한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매주 수요일 부암동에서 하는 <개벽학당> 덕분이었다. 개벽학당의 공부와 수양이 없었다면 대학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진즉에 뛰쳐나왔을 것이다. 인류세, 초지능, 호모데우스. 개신유학, 원불교, 한살림, 천도교. 학습과 수양. 수신제가치국평천하.
3월 초부터 6월 말까지 4개월간, 개벽학당에서는 인류와 지구가 직면한 다급한 문제들을 촘촘히 들여다봤다. 우리는 인류세를 살고 있다. 인간은 전대미문의 힘과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집합적 의지에 의해 만물과 지구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한편, 초지능의 부상을 목격하고 있다. 벽청들과 함께 읽은 <<라이프 3.0>>에 따르면, 머신러닝은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한마디로 인간보다 훨씬 똑똑한,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 여겨지던 자유의지와 자율적인 선택능력까지 지닌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인류는 거대한 전환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가.
우리가 구태여 ‘개벽’을 들여다 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거대한 전환 앞에 망연히 서있는 인류의 출로를 궁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난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신유학, 원불교, 한살림, 천도교. 최제우가 1860년대에 개창한 동학, 그러니까 개벽에는 자본주의, 산업혁명, 서세동점의 세기가 산출한 기후변화와 지구문명의 위기, 인류세로의 진입과 머신러닝의 부상이라는 대전환을 돌파할 논리들이 담겨있었다.
이 네 글자를 발음할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였다. 최시형은 신위의 방향을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로 돌려버렸다. 최시형이 신위의 방향을 우리에게 돌린 이유는, 우리 모두가 신성한 우주와 하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늘이니 너도 하늘이다. 나이와 신분과 딱딱한 관념은 훌훌 털어버리고 우리 맞절을 주고받자.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개벽은 맑스를 경유하지 않고도 만인과 만물의 평등을 떠올렸다. 개벽의 품안에서는 군자와 소인, 문명과 야만,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친척과 남남 등의 전통적인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상하관계와 친소관계를 규정하는 차등의 예를 벗어던지고, 상호가 존엄하고 평등한 관계임을 선언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개벽은 백성이 행복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가진 경세론이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이 태동하던 구한말의 보국안민은 자주독립운동으로서 발현되었다. 쉽게 말해서 조선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하지만 단순히 조선의 평화와 부국강병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신조선’을 건설하는 것에서 한 발 짝 더 나아가 치국-평천하, 즉 세계의 평화까지 염두에 두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상천국’을 현세에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지난 4개월 간, 개인의 변화를 시작으로 국가론을 거쳐 평화로운 세계 체제의 건설까지 구상했던 개벽을 탐구하며 때때로 아찔함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개벽을 또 다른 책상물림과 탁상공론으로 흘려보내지 말자.
무언가를 한다는 말에는 의지가 개입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힘써서 선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말은 어떤 당위를 위해서 구태여 일을 진행한다는 뜻이 된다. 반면 ‘산다’는 말은 의식하지 않아도, 힘써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을 뜻한다. 어떤 가치가 한 번 내면화 되면, 이후에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삶은 그 가치에 따라 운행한다. 우리가 해야 할 건 개벽을 ‘사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하늘님을 자각하고, 나와 함께 전환의 시기를 견뎌낼 이웃과 동지들을 정성껏 돌보자. 부디 거대한 전환의 시기를 무사히 건너가자.
후천개벽의 후천개벽을 열어젖히자.
후천개벽의 후천개벽 시대에서는 동서의 결합이 긴요해질 것이다. 방학을 맞이하여 20권 정도의 책을 대학 기숙사에 가져갔다. 그 중에서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앙띠 오이디푸스>>,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 김상준 교수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를 함께 읽고 있다. 우선 나부터 동과 서, 고와 금을 가리지 않는 미더운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앞서 사회학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회학이 시사하는 바는 유효하다. 1000년간 저 광활한 대륙을 통치했던 유교의 경험과 현실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사회학의 경험이 만나야 한다. 후천개벽의 후천개벽의 시대에서는 지성을 단련하는 것에만 그쳐서도 안 될 것이다. 유려한 자유형으로 물살을 가르고, 나무를 깎아 손수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내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해 한 끼 든든한 밥상을 차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옹이가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개벽을 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 개벽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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