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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Sep 10. 2019

개벽할래?

-<개벽파선언>을 읽고 (7)

[편집자 주] 이 글은 '개벽학당' 제1기 마지막 수업 시간(2019.6)에 '개벽파 선언'(원고)을 읽은 소감을 발표한 글입니다. <개벽신문> 제88호(2019.9)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느린 (조성현)

개벽학당 당장 로샤(호로샤-방랑자, 이병한) - 개벽파 선언의 저자 

1. 아하, 개벽


3월부터 <개벽학당>을 열심히, 또 쉬엄쉬엄 그리고 띄엄띄엄 드나들었다. 인류세와 AI를 공부할 때에는 책을 열심히 읽고, 리뷰를 꼬박꼬박 쓰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하지만 떠별들과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한 달 정도 개벽학당을 비우게 되면서 천도교, 대종교 등의 개벽종교들의 논의에 대해서 거의 쫓아가지 못했고, 결국 개벽학당에서 말하는 개벽이 어떤 맥락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로샤와 새별의 <개벽파선언>을, 지나가는 지난밤을 붙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을 하고 나니,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어떻게 가고자 하는지, 흩어져 있던 공부와 떠다니던 이야기들이 구슬을 실로 꿰듯 ‘개벽’이라는 단어로 연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긴긴 서신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언뜻 봤을 때, 한자어와 개념어들이 넘쳐나서 지루하지 않을까 과연 밤새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로샤와 새별이 서로 주고받는 뜻과 에너지 때문이었는지 밤새 좋아하는 만화를 읽는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하게 <개벽파선언>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2. 이어지는 정신


새로운 개벽파의 출현을 바라보면서, 유대교의 개혁을 살아낸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 정신은 오롯이 살아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로 이어져 내려왔듯이, 우금치 고개에서 죽고 흩어진 동학도들의 정신이 3.1운동을 지나 지금 여기에서 이어져가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비폭력주의의 역사, 평화주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예수, 톨스토이, 간디, 바드샤칸, 마틴 루터킹, 함석헌으로 각 시대와 공간속에서 이어져 내려가는 그 어떤 평화의 물줄기를 발견해 나갔었는데, 인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안내해가는 또 하나의 오래된 새 물줄기를 ‘개벽’으로 바라보는 역사와 사상을 통해서 만난 기분이다. 


물질개벽과 제도개벽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정신개벽은 그 모든 개벽의 근간이 되기에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농부들이 땅에 심을 씨앗을 먹지 않고, 소중하게 지켜내듯이, 엄혹한 시대 속에서도 ‘개벽’의 씨앗을 지켜 오신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우리가 심으려 하는 씨앗은 우리의 시대에 몇 배의 열매를 거두게 될까?   

개벽학당 전임(?) 교수 새별 조성한 - 개벽파선언의 또 한 저자 

3. 벽을 넘고, 벽을 부수기


개벽의 키워드는 회통과 창조라는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기존의 방식과 사상을 답습하고 연구하는 것만이 아닌 기존의 모든 사상과 실천들을 함께 거름 삼아서 사람들을 먹여 살릴 새로운 나무를 키워내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다. <개벽파선언>에서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술이라는 본질은 유지하되 지금에 맞는 생각과 방식으로 개벽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뻔한 생각을 해본다. 


예수라는 발판을 통해서 유대인과 유대교라는 경계를 넘어섰기에 작은 중동의 종교에서 세계종교가 된 기독교처럼, 개벽의 이야기가 한국에서부터 시작되지만, 한국을 넘어서 각 국가와 민족, 지구를 살리는 사상과 삶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모든 종교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좀 이른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지만, 무엇을 ‘개벽’의 알맹이로 두고, 각 지역의 환경과 맥락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해산의 고통이라는 표현처럼 새로운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은 어려움과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수행과 수련은 어려움 속에서도 개벽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4. 삶의 개벽


인류세와 AI를 공부할 때에는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구가 새삼스럽게 별천지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개벽사상을 공부하면서는 기존의 사상과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한편 들기도 했다. '기존에 대안공동체, 대안교육, 대안정치, 대안종교 등등에서 이야기하던 것들과 아주 다른 것인가?'라고 했을 때, 물론 ‘개벽’만의 독특성도 있을 것이고, 유불선, 기독교 등과의 접촉지점이 있다는 생각만 드는 정도이다. 


성속합작, 동서회통 등의 이야기가 아직 나에게는 관념으로만 남아 있기에 아직은 조금 붕 떠 있고, 때때로 허무한 느낌이 있다. 아직 개벽이 내 일상에서 해석되고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느낌도 든다. 물론 내 일상에도 개벽의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통합적인 삶으로 아직 승화되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자본주의의 삶의 양식이 아파트와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프랜차이즈 식당, 이마트, 지금 시대의 쿠팡이라면, 개벽의 삶의 양식, 생산소비양식은 무엇일까? 그것들이 좀 더 가시화 된다면, 개벽이 좀 더 손에 잡히고, 개벽을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일본의 기획그룹인 ‘츠타야’를 경영하는 마스다 무네야키씨의 책을 흥미롭게 보았다. 앞으로 다가온 시대의 삶의 방식을 그려보고, 그것을 공간과 상품으로 기획하여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그룹의 이야기는 정말 상업과 경제의 영역에서 역시 전환이 가장 빠르고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츠타야에서 미디어, 디자인, 프로덕트, 건축, 사상, 경제, 문학, 예술, 건강, 생명, 인류라는 11가지의 주제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앞으로 격변하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그것을 준비할 것인지 대담하였는데, 계속 기존의 방식으로 장사를 하고,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이라는 생활방식을 제안하였듯이, 철학과 비전을 토대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해 나가는 기업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개벽하는 청년들, 개벽세대, 개벽학당의 당원들!


5. 나는 왜 여기에 서있나?


“나는 왜 개벽학당에 있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로드스꼴라에 길별로 일하다 보니 어쩌다 개벽학당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데, 막상 공부하다보니 좋기도 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한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운명론이 믹스된 것이 인생이라는 인생관을 가진 나로써, 흘러들어온 ‘개벽’이라는 물줄기를 타고 내 인생이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지켜보려 한다. 


<개벽파선언> 구입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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