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파선언>을 읽고(8)
[편집실 주] 이 글은 '개벽학당' 제1기 마지막 수업 시간(2019.6)에 '개벽파 선언'(원고)을 읽은 소감을 발표한 글입니다. <개벽신문> 제88호(2019.9)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 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때로는 한계를 벗어난 곳에서 설명 없이 설명되기를, 오해로 이해되기를.” (Auto, 김봉곤)
2018년 두 게이 소설가의 소설집이 한국 출판시장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문학인의 첫 커밍아웃이었고 ‘K-오토픽션’이란 장르의 탄생이었습니다. ‘오토픽션’(Auto Fiction)은 프랑스 소설가 세르주(Serge)가 소설과 자서전 중간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장르입니다. “자동적으로 쓰는 소설”이란 뜻도 됩니다. 소설집을 소개하며 작가 스스로 ‘사소설(私小說)’이란 말을 쓰기도 했습니다. 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만 쓰겠다는 선언이고 다짐이었습니다.
그렇게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와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가 출판됐습니다. 때마침 김건형이 <2018, 퀴어전사 ― 前史·戰史·戰士>라는 평론으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문학계 안에서 퀴어 당사자로서 퀴어문학을 지지하는 독해를 시도했습니다. 2016년 출판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이 누적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할 무렵이었습니다. 페미니즘과 퀴어의 전면등장은 무관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남성영웅 이순신의 내면을 그린 <<칼의 노래>>(2007)와 모성애를 가진 엄마를 그리는 <<엄마를 부탁해>>(2009)가 100만부를 넘기던 10년 전과 달라졌습니다. 여성과 X성, 다시 말해 비남성들이 ‘궁궁을을’ 읽고 쓰고 실천하고 기도하고 염원하는 주체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지금의 동학도가 아닐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동학의 주문을 외우며 자신들이 살고 싶은 시공간을 상상하는데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을지. 영성과 신성을 체현할 가능성을 가진 마음들이지 않을지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개벽학당에 가능한 많이 초대하고 싶습니다.
저 또한 그런 마음으로 개벽학당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2015년 미국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된 후 동성애자의 삶이 나아졌는지 헷갈렸습니다. 오히려 뒷담화가 심해지고 대화가 사라지고 갈등과 반목의 넓이만 커진 것 같았습니다. 그 맥락에서 트럼프가 미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반동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동성혼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의 타협 없는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중도층이 옅어지고 민주당·공화당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어떨지 상상해보았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미국은 지금 PC(정치적 올바름) 논쟁이 활발합니다. 동성혼을 합법화하는데 찬성한 사람들이 종교와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 ‘메리 크리스마스’를 쓰지 말자고 주장해서 비웃음을 삽니다. 미국의 본사를 둔 인기 게임의 캐릭터들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레즈비언과 게이가 되어서 비아냥을 듣고 있습니다.
저는 기계적 평등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기계적 평등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끼리 법적 혼인의 권리를 쟁취해서 살고 싶기보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인정을 받는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로샤의 <<반전의 시대>>는 정확히 그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읽다가 허벅지를 내리쳤던 것입니다. 2019년 상반기엔 자주 부강하기보다 건강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페이지를 펼쳐 읽었습니다. 경물‧경인‧ 경천. 길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도 존경할 수 있다면 자연히 동성애에 대해서도 반감이 사라져 있을 겁니다. 긴 시간을 두고 넓은 지역을 포괄하여 동성애에 대한 인식을 개벽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퀴어의 회심은 저로만 그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인복이 많았습니다. 스무살에 하자센터에서 어딘을 만나고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화점에서 명품가방이 사고 싶은데 살 수 없어서 서글픈 백수꼴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공부도 하고 글도 쓰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어 주변을 괴롭혔을 겁니다. 제가 한국에 서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냉엄하게 보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개벽학당까지 흘러왔습니다. 로샤와 새별의 언어들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벽청들을 보며 매일 놀랍니다. 글쓰고 춤추고 노래하고 토론하는 벽청들이 없으면 ‘나’가 없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한 명 한 명 에너지가 모여 거대한 에너지원을 만들어서 개벽학당이 굴러가는 듯합니다. 그 힘으로 저도 개벽학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벽파선언>>을 읽고, 다른 게이와 레즈비언과 퀴어들이 그 빛남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등장과 출현이 빚지고 있는 사상은 불과 100여년이 채 안된 ‘개화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시몬드 보부아르, 케이트 밀레트, 주디스 버틀러. 페미니즘의 이론가들은 19세기 이후에 살았던 백인 여성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나 여기 있어요! ‘존재로 보여지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존재 자체로 보여진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리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국가의 중심과 핵심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개벽학이 그들의 다음 단계의 사상적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학이 바로 여성을 핵심주체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경물‧경인‧경천, 삼경(三敬) 사상 속에 차별은 없습니다. 사안으로 차별을 안 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전체로 차별을 없애야 하고, 그게 개벽학의 수양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막 보여진 그 비남성들을 개벽학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수양하고 각성해서 다음 논의로 넘어가야 지금 일상에서 벌어지는 타자혐오와 막말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덕개벽과 같은 단어에 물음표를 달게 됩니다. 자칫 <<개벽파선언>>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텍스트로 느껴질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이나 윤리란 단어가 다급하기보다 온화하고, 내면의 부르짖음보다 외부의 압력을 떠올리게 해서 ‘에티카’라는 단어로 대체한 사람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었습니다. 제가 영국과 미국을 좋아하는 개화파로 자란 이유 중 하나는 도덕과 윤리란 단어보다 에티카가 세련되어서입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자주 고상 떨면서 사용하는 언어와 논리가 도덕과 윤리입니다. 당위와 압박처럼 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새별 강의 중에 도덕을 ‘도’와 ‘덕’으로 나누어서 봐야한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도는 “나의 행위”이고 덕은 “내가 한 행위의 결과”로 봐야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도덕’이란 말이 새로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 ‘도덕’이 아니라 <<도덕경>>부터 먼저 외어야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학을 통해 아예 다른 감각의 어린이를 길러야 한다”는 로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기르는 것일 테죠. 계속 의심을 거둘 수 없던 ‘개벽’이란 말은 이제 편안해졌습니다. 다행히 개벽이란 말에는 어떤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아서 낯섦만 넘으면 금방 친숙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떠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 아니라 “술이창작”(述而創作)으로 -. 새별의 강의에서 하나의 문구를 가슴에 담아 갑니다. 도덕은 각각의 창의성을 부추기고 각각의 존재를 발현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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