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시는 책 - 021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극단적인 대립을 근본적으로 혁파하는 길은 이 정도의 큰 비전이 전제되어야 한다. 1907년에 천도교의 신지식인 오상준이 집필하여 발간한 <<초등교서(初等敎書)>>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사상의 고리’를 복원하면서, 이러한 비전을 제시한다.
지금 우리는 잃어버렸지만, 19세기 중엽 이후 1910년 국권을 상실하던 그 시기에, 새 나라 건설의 설계도를 들고 절치부심하던 사람들(세력들)이 있었다. 개화파도 아니요, 척사파도 아닌 그들은 개벽파(동학파)로 부를 수 있다. 그 무렵의 개벽파는 오히려 민중의 절대다수의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그들의 꿈이 그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깊은 저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신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이 결정적으로 외세-친화적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은 해방-분단 이후의 국면에서이다.
수십 년간 쌓아온 산업화-민주화의 긍정적 동력이 바닥 난 지금, 통일의 새로운 동력이 분단 역사의 관성과 외세의 간섭으로 저지억제의 걸림돌에 걸려 허우적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나라에 대한 비전을 두고 많은 토론과 깊은 공감을 만들어가야 한다. 다행히,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그 압도적인 외세-서구 친화적인 근대화(산업화/민주화)에서도 촛불혁명이 끝끝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개벽파의 저력 덕분이라는, 새로운 발상, 도전적 전망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오상준의 <<초등교서(初等敎書)>>는 새로운 문명의 개벽을 표방했던 동학(東學)의 관점에서, 개화-근대화라는 구체적인 국면에 즈음한 신 국가, 신문명론을 담고 있다. 28개 항의 주요한 정치적, 철학적 신문명어(주로 서구로부터 유래한)를 동학의 세계관으로 재조명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나와 우리, 그리고 우리 정신, 우리나라의 새로운 면목(面目)을 기약하였다. 오상준은 ‘종교문명과 정치문명의 진보로써 도덕문명을 구현’하는 경로를 제시한다. 즉 ‘하늘사람’으로서의 개인과 ‘우리’ ‘우리 교’ ‘우리나라’[吾人, 吾敎, 吾國]의 일치를 기반으로 해서 “공화와 자치, 사회의 영성화”를 토대로 하는 신국가를 전망했다. 그중의 한 요소인 ‘천인공화(天人共和)의 사상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1919년 전후 ‘민주공화주의’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의 원점이 된다.
그러나 즉 동학의 신국가, 신문명 건설의 비전은 식민지화와 함께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본격적인 건설기에 자주적, 동학적, 개벽적 국가 건설 구상을 압도한 것은 서방(미국)과 동방(소련)을 배경으로 한 서구적 개화적 근대의 전망(이데올로기와 기독교)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경험이 더해져, 남쪽에서의 군사화, 서구화, 기독교화, 산업화, 민주화의 거대 흐름은 ‘동학적’ 신국가 건설 전망을 한때의 전설 내지 ‘패배한 민족주의의 과거 기억’으로 묻어 버리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시간과 경험을 축적해 왔다. 이미 절대다수의 한국인은 그러한 비전이 존재했는지조차 알지도 못하는, 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상준이 자리매김한 ‘하늘문명’의 비전은 그 스스로가 창안한 구상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 심성에 내재한 ‘하늘관념’으로부터 비롯된 만큼, 우리의 체질과 심성이 완전히 서구화되어 버리지 않는 이상, 피와 DNA 수준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 완성되고나 반대로 절멸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상 언제나 우리 미래에 존재하는 ‘오래된 새것’으로서 “무한히 넓고, 깊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면서 이루어가야 할 무궁한 ‘하늘문명’”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때가 도래하고 있다.
“개벽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외피를 입고 역사적 과제와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새 하늘(新天), 새 땅(新地), 새 나라(新國)를 이루는 하늘정신의 문명운동은 이 순간도 새 사람(新人)이 이루어 나가는 중이다.” 초창기(1900~1920년대) 동학파(개벽파)의 문명개화는 우리 것을 토대로 새로운 문명을 취해 “하늘문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즉 개벽파의 ‘개화’는 서구문명화나 물질문명화을 지향한 것이 아니다. ‘천인일치(天人一致)’의 ‘동귀일체(同歸一體)’에 기초하여 도덕적 정신문명과 공화의 국가문명을 형성해 가고자 한 인문개벽의 문명개화였다. 그 ‘동학 문명론’은 바로 여기–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촛불혁명 이후, 국가와 민족, 시민과 사회의 새 길 찾기에 결정적인 착안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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