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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을 둘러싼 논쟁

― 서구 계몽주의와 조선 성리학을 중심으로

by 소걸음 Apr 05. 2020

정 채 현 | 서강대 철학과 3학년

*이 글은 <개벽신문> 제91호(2020년 1월호)에 수록되었습니다. 



1. 들어가며


최근 들어 우리가 흔히 ‘도덕’이라고 부르는, 혹은 도덕에 관한 학문인 ‘윤리학’에 대하여 종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접근 방식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덕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이다. 일견 도덕과는 무관해 보이는 생물학이 도덕 담론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도덕에 대한 이 같은 접근 방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 있다. 그들은 동물들의 행동에서 우리가 소위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침팬지 폴리틱스>, <동물의 감정에 관한 생각>, <공감의 시대> 등 수많은 명저를 쓴 동물행동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수많은 동물들에게서 관찰되는 여러 공감 행동을 통해 ‘공감’이 진화적으로 뿌리 깊은 동물적 본능임을 밝히고, 그로부터 비롯된 이타성과 공정성의 발현은 결국 종의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의 결과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즉, 동물들도 공정성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서 서로 협력하고 나누고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공감(empathy)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동물행동학자, 진화심리학자들까지도 이 동물들의 공감 능력이 인간 도덕성의 기초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도덕이 이성과 대비되는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뜻이자, 옳고 그름의 도덕적 판단이 이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즉 동물들도 기본적인 수준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고, 감정과 이성이라는 두 요소를 생각해볼 때 인간의 도덕성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감정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학을 둘러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데이비드 흄(1711-1776)이다. 흄은 자신의 저서 <인간 본성에 관한논고>에서 이성에 대한 감정의 우월성, 도덕적 근원에 대한 감정의 근본성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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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사단칠정 논쟁, 줄여서 ‘사칠논쟁’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오간 왕복편지를 통해 약 8년 간에 걸쳐 전개되었던 성리학 논쟁이다. 이들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대표되는순수하게 선한 도덕 감정인 사단(四端)과 ‘희노애락애오욕’으로 대표되는 일반 감정인 칠정(七情)을 깊게 탐구하여, 각각의 기원과 발현 과정을 논함으로써 사람의 본성과 감정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 중 퇴계는 기본적으로 사단은 리(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라고 보았다. 사단은 순리(純理)에서 발한 것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 반면 칠정은 기를 겸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퇴계의 입장에서는 사단과 칠정의 기원은 엄연히 다르므로 이 두 감정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감정이 된다. 반면, 고봉은 퇴계의 리발(理發)을 인정하지 않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해서 리가 거기에 올라탄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사단은 칠정의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칠정 이외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사단이 그 일부로 포함된다는 것이다. 칠정 가운데 중절(中節)한 것, 즉 조화가 잘 이루어져 도덕적으로 선하게 된 감정이 사단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성리학의 사단칠정 논쟁의 핵심은 리와 기를 기반으로 한 사단과 칠정의 기원과 그 발현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칠 논쟁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서 살짝 벗어나, 사단과 칠정이라는 감정의 ‘감정성’ 혹은 ‘감정임’에 주목해볼 것이다. 먼저 앞서 언급한 현대 윤리학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도덕적 판단에 대한 근원으로서 이성과 감정의 문제를 크게 칸트적인 견해(Kantian view)와 흄적인 견해(Humean view)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단과 칠정이라는 감정에 대한 퇴계와 고봉의 관점을 도덕적 판단의 근원이 되는 이성과 감정이라는 틀에 입각해 해석해보고 적용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대립적 견해


감정이 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에 있다는 견해를 알아보기에 앞서, 이들과 사상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입장으로, 도덕적 판단에 있어 이성의 근본성을 주장한 철학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철학의 대표 격으로 이성의 합리성을 극도로 강조한 칸트의 윤리학을 꼽을 수 있다. 칸트의 윤리학에 다가갈 수 있는 저작들로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실천이성비판>, <도덕형이상학> 등이 있는데, 이들로부터 인간 이성에 대한 그의 낙관 내지 확신을 엿볼 수 있다. 칸트는 인간 존엄의 이유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에서 찾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칸트에 따르면, 내가 자유로울 때는 내 의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에게 법칙을 내려줄 때뿐이고 그 역할은 당연히 이성의 몫이 된다. 즉, 이성이 내 의지가 따를 법칙을 결정해 주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성의 특별한 능력은 칸트철학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해준다.


칸트의 윤리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타고난 이타주의자와 도덕적 인간 혐오자를 비교하는 예시가 있다.1 전자는 선량한 본성을 타고나 자연스럽게 남을 돕는 따뜻한 심성을 지닌 사람인 반면, 후자는 연민과 동정심을 결여하고 있지만 순전히 의무감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여기는데, 그 이유는 도덕이 감정이 아니라 순수한 이성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칸트윤리학에서 순전히 의무감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할 때, 이 의무감을 감정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철저한 이성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도덕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 방식을 포함하여, 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에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 흄적인 견해이다. 오늘날 이들이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을 고려해볼 때, 현재의 정세는 가히 칸티언(Kantian)들의 약세이자 흄이언(Humean)들의 강세라고도 할 수 있다. 흄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이성은 정념(감정, passion)의 노예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이성과 감정에 대한 흄의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흄이 보기에 이성은 그 자체로 행위를 위한 욕구를 생성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만으로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욕구를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내 안에 감정과 이성이 싸우고 있다”는 말이 있다. 흄이 보기에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감정과 감정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그 자체로 우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은 욕구 자체를 생산해낼 수 없고 단지 원래 존재하던 감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계산하는 일을 수행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역할은 이미 존재하는 감정이나 욕구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한정된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의 근원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 되고,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은지 아닌지는 그 행위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긍정적인지 아닌지가 전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감 능력을 도덕성의 기초로 간주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칸트적인 견해가 아닌 흄적인 견해를 지지한다. 영장류를 비롯하여 인간 이외의 종들에게도 공감 능력이 광범위하게 발견된다는 사례들을 확인한 후에, 도덕성의 원천이 인간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이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식이다. <행복의 가설(The Happiness Hypothesis)>,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 등의 책을 쓴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그가 발표한 "정서적 개와 이성적 꼬리"라는 논문에서 도덕적 판단에 대한 이성주의의 대안으로 ‘사회적 직관주의’를 제안한다. 하이트는 논문의 말미에 “도덕적 정서와 직관이 마치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도덕적 이성을 조종한다는 흄의 명제를 다시 생각해 볼 때”라고 글을 마치고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논문의 제목에 나오는 개의 몸통을 정서에, 개의 꼬리를 이성에 비유한 이유를 알려주고 있다. 어디까지나 감정이 선행하고, 이성은 그 감정을 뒤따르며 감정이 이미 내린 결론을 합리화하는 일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고유의 이성의 힘을 최대한 축소시켰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인간의 행위도 동물의 행위로 연구해야 하고, 인간의 모든 것은 생물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도 동물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생물학의 특수 분과 학문으로 축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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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단칠정논쟁에의 적용


그럼 이제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단칠정에 대한 관점을 도덕적 판단의 근원에 대한 문제와 연관지어 보자. 퇴계와 고봉은 사단(四端)이라는 도덕 감정과 칠정(七情)이라는 일반 감정의 기원과 발현과정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사단과 칠정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퇴계는 도덕 감정인 사단을 일반 감정인 칠정과 엄연히 분리시켜 다룬 반면, 고봉은 사단이라는 도덕 감정도 결국 칠정 가운데 중절한 것, 즉 조화가 잘 이루어져 도덕적으로 선하게 된 감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별도로 상정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퇴계에게는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른 두 집합이고, 고봉에게는 사단도 칠정이라는 감정 일반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집합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볼 때, 퇴계와 고봉은 모두 “인간은 사단이라는 도덕 감정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들에게 사단은 도덕적 판단을 유발하는 토대이자 그것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특히 고봉의 경우에는 사단의 감정을 칠정이라는 감정 일반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간 도덕성의 근원에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것은 고봉이 말하는 감정이 현대 윤리학에서 언급되는 도덕적 판단의 근원으로서의 감정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성의 대항마로서 감정을 지지하는 오늘날의 견해에는 분명 동물이 논의의 핵심에 있고, 그 요지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인간과 유사한 도덕적 판단을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고봉은 퇴계와 같은 성리학자이지 생물학자나 동물행동학자는 아니다. 고봉에게 있어서도 사단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도덕적 감정이고, 본능적 식색(食色)의 성(性)만을 갖는 인간 이외의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다. 즉, 고봉이 감정을 도덕적 판단의 근원이라고 해석한다 해서 그것을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다거나, 다른 동물들도 인간처럼 그러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넓게 본다면 퇴계 역시 고봉과 마찬가지로 사단이라는 도덕 감정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인간 도덕성의 근원을 감정에서 찾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단과 칠정 간의 관계가 고봉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접근해야 한다. 고봉에게 있어 도덕적 판단의 근원이 감정이었다고 한다면, 이황의 경우에는 감정은 감정이되 이성 쪽에 조금 더 다가가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에게서는 사단이 일반 감정이라는 감정의 큰 테두리 바깥에 있다는 점, 사단이 칠정과 섞여서도 안 되고 섞일 수도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해볼 때, 퇴계의 사단은 서구의 근대적 이성과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고봉의 경우보다 더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 고유의 본성, 인간만이 가지는 것으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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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으며


이상으로 이성과 감정이라는 두 개의 큰 줄기 아래 현대 윤리학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성리학을 빛낸 사단칠정 논쟁의 두 주인공, 퇴계와 고봉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견해를 살펴본 뒤, 도덕적 판단의 근원으로서 이성과 감정이라는 틀에 입각하여 퇴계와 고봉의 관점에 적용해보는 시도를 하였다. 그것을 통해 도출된 결론은, 퇴계와 고봉 모두에게 있어 도덕성의 근원은 감정이었지만, 양자의 차이는 퇴계가 고봉보다 이성 쪽에 조금 더 다가가 있는 감정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칸티언(Kantian view)으로 대표되는 이성 측과 흄이언(Humean view)으로 대표되는 감정 측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 오히려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이 다투고 있는 문제 자체가 애당초 정해진 답, 즉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는 맞은 사람, 틀린 사람 없이 양쪽 모두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이 있었다면 다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요, 애초에 오늘날 화젯거리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이 문제가 모두에게 쉽지 않은 난제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장 안에서 펼쳐지는 이성 작용과 감정 작용의 경계의 모호성에 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를 이성의 작용의 결과로 볼 것이고 또 어디까지를 감정의 작용의 산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반성해보고, 성찰해본다 한들 자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측면은 도덕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가 다양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글에서는 퇴계와 고봉의 도덕적 판단의 근원에 대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았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시공을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기를 바란다.


* 이 글은 2019년 가을학기에 서강대 철학과에 개설된 <한국성리학사> 수업 시간에 제출한 기말레포트이다.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2014, 161-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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