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ul 16. 2020

유교 이야기로 드러난 기독교의 씨알

-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를 읽고

* 이 글은 7월 13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한국 信연구소 개소식 및 출판기념회>에서 발표된 글을 발표자(이선경) 및 주최측의 동의를 얻어 전재하는 것입니다. 제목은 옮긴이가 본문 속에서 뽑아 새로 붙였습니다. 


이선경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철학연구소)


1. 말씀을 통해 내재적 초월을 살아냄으로써 나의 존재를 실현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읽기>라는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이 ‘집사람’이 기혼여성을 의미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통상 유교와 페미니즘은 상극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은선 교수님은 유교와 페미니즘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분이시라서, 기혼여성들의 입장에서 <<논어>>를 읽음으로써 유교와 페미니즘이 대화해 보자는 의도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사람’이란 ‘저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이고, <<논어>> 읽기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른바 ‘내재적 초월’을 살아내자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남성도 여성도 모두 ‘집사람’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하는 것이겠지요. 


또 하나, 말씀과 언어를 매개로 한 관계성의 의미로 <<논어>>를 읽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논어>>가 논할 論, 말씀 語 아니겠습니까?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 언어로 지어진 집에 존재를 담그고 사는 ‘집사람’입니다. 


이교수님은 信과 誠의 의미로 논어를 읽으십니다. 信은 사람 人과 말씀 言을 합한 글자입니다. 誠은 말씀 言과 이룰 成 자가 합해진 글자이지요. 모두 言이 들어갑니다. 미더움이란 사람과 사람의 대화 속에서 관계맺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그 말씀을 몸으로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다움을 구현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誠, 말씀이 이루어짐으로 해석하신다고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말씀을 통해 내재적 초월을 살아냄으로써 나의 존재를 실현하기를 기도합니다가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2. 의 실천으로 에 이르기를!


이 책의 두 번째 포인트는 禮의 실천으로 誠에 이르기를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님은, 존재는 말을 매개로한 ‘관계’에서 시작되므로 존재의 창조자는 말이며, “그 언어와 말이 우리의 몸과 행위로, 사물과 사건의 창조로 현현되지 않고서는 실재(reality)가 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책 서문의 첫 말씀이 ‘禮의 수련을 통한 誠의 실현’인 것은 필연적 결과라 하겠습니다. 


이 교수님은 “극기복례(克己復禮) 구이성의(久而誠矣)”라는 퇴계 선생의 말씀으로 서문의 첫 소절을 열었습니다. 풀어보면 “극기복례, 나를 이겨서 禮를 회복하기를 오래도록 해나간다면 誠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禮는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는 구체적 행위이므로, 禮가 아니고서는 말씀이 reality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교수님은 이 책의 곳곳에서 禮는 나 자신의 야만적 폭력성을 기꺼이 버리고 인간을 존중하고 남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임을 일깨우며, 전통, 권위, 종교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담고 있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중용>>에서는 “誠이 아니고서는 만물이 존재할 수 없다[不誠無物]” “誠은 사물의 끝이자 처음이다[誠者, 物之終始]”라 하여 존재의 본질이 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誠 자체는 하늘의 일이고, 誠을 이루려는 것은 인간의 일[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이라고 합니다. 誠을 만물의 본질로 여기는 유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禮를 실천하는 궁극적 목적은 존재의 본질인 誠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 교수님은 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言]을 이루어내는[成] 일이야말로 하늘의 일[天之道]과 인간의 일[人之道]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유교전통이 인간의 일과, 특히 그 언어와 말의 일을 바로 하늘의 일로 보았다는 점에서 信學과 信연구소가 유교와 대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일반적으로 유교의 문헌에서 誠을 ‘언어’의 일로 해석하지는 않습니다만, 기독교적 시각에서 誠을 ‘말씀이 이루어짐’으로, 信[믿음]이 말을 매개로 하는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해석은 두 전통의 만남을 통해, 유교에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말씀이 몸이 되는 것이 聖육신이라고 한다면, 극기복례를 오래 함으로써 誠에 이를 수 있다는 퇴계의 말씀은 기독교의 聖육신사상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유교에서 수양의 궁극 목적은 자기존재의 본질인 誠을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3. 을 통한 기독교와 유교의 만남


이 책의 궁극적 지향은 (神學 이후의) '信學'을 통해 기독교와 유교의 만남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교수님은 <<논어>>에서 信이 얼마나 중요한 정신인가를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그의 쓸모를 알지 못하겠다[人而無信, 不知其可也].”라는 구절을 필두로, 여러 모로 말씀하십니다. 공자가 <<시경>> 300편을 한마디로 “생각에 거짓이 없다[思毋邪]”라 평한 것이나, 한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조건은 경제력과 군사력보다 사회적 신뢰가 관건이라 지적한 것 등을 들어 믿음과 신의가 관계맺음의 바탕임을 역설하십니다. 


제가 “信 연구소”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이 미더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주역>>의 중부괘䷼입니다. 중부中孚는 ‘마음속이 비어 있어서 사사로운 욕심이 없이 미더움으로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孚 자는 발톱 조(爪) 밑에 아들 자(子)를 씁니다. 어미새가 새끼를 발톱으로 꽉 움켜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미새가 새끼를 발톱으로 움켜잡고 옮기면서 결코 떨어뜨리지 않겠지요.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그러한 미더움이 中孚입니다. 


중부괘의 경문經文은 이러합니다. “미더움이 돼지나 물고기 같은 둔한 생명들에게까지 미쳐나갈 수 있다면 길하다. 큰 내를 건널 만하니, 바르게 하는 것이 이롭다[中孚, 豚魚, 吉, 利涉大川, 利貞].” “미더움으로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하늘이 호응할 것이다[中孚, 以利貞, 乃應乎天也.]” 돼지나 물고기는 너무 둔해서 감응하기 어려운데, 그런 둔한 생명들까지도 감동시킬만한 정성으로 일을 해나간다면 하늘이 호응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유교의 최고 경전인 <<주역>>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삶의 방식입니다. 


제가 ‘信연구소’의 이름에서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논어>>에 나오는 恕입니다. 같을 여(如) 밑에 마음 심(心)을 쓰지요. 우리는 통상 ‘용서할 서’라고 읽지만, 본래의 의미는 ‘내 마음의 진실함을 잣대로 해서 남에게도 그렇게 미루어 나간다’는 뜻입니다. 이 교수님의 손자 손녀 이름이 ‘信恕’ ‘眞恕’이지요. 


<<논어>>에 보면 공자의 제자가 “한마디 말로 평생을 지킬 만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아마도 恕일 것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이 信과 恕는 의미가 통하는 바 있습니다. <<논어>>에는 ‘忠恕’도 있고 ‘主忠信’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라고 하였는데, 그 꿰뚫은 하나가 바로 忠恕라고 일컬어집니다. 忠은 가운데 中과 마음 心이 합한 글자로 내 마음의 중심을 말합니다. 忠은 내적으로 수렴된 가장 진실한 내 마음이고, 恕는 그것을 밖으로 펼쳐나간다는 의미가 됩니다. 내 마음의 구심인 忠을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밖으로 펼쳐나가는 일이 恕입니다. ‘忠信’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역>>「계사전」에 보면 “자벌레가 구부림은 (몸을) 펴기[信] 위해서이다[尺蠖之屈, 以求信也,]”라 하는데, 이때 ‘편다’ ‘펼친다’가 바로 信자입니다. 그러므로 ‘忠恕’와 ‘忠信’은 그 의미가 상통하다는 것입니다. 


현장아카데미의 ‘顯藏’은 <<주역>>에 나오는 말입니다. “仁에서 이미 드러나 있고, 쓰여지고 있음에 감추어 있다[顯諸仁, 藏諸用].” 桃仁[복숭아 씨], 杏仁[살구 씨]이라 하듯, 仁은 때로는 생명의 씨앗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의 仁은 ‘씨알 씨앗’으로, 用은 ‘이미 꽃피고 열매 맺어 눈앞에 드러남’의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씨알에 이미 삼라만상이 드러나 있으며, 눈앞에 현현되는 세계에는 그 씨알의 원리가 감추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 읽기>>는 유교의 이야기로 드러나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의 씨알이 유교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그것은 유교와 기독교를 넘어서는 진리의 씨알이 기독교와 유교를 넘나드는 ‘信學’의 형태로 현현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信연구소와 顯藏아카데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은선 #사유하는_집사람의_논어_읽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