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문학연구소-근대사상읽기-두 번째] 이종린의 '천유아생(天由我生)'과 '금일(今日) 종교시대' 두 편의 논설을 읽었다. 그중 '천유아생'은 "한울이 나로 말미암아 태어났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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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나 이전[前我] 천백 대(代) (동안) 한 번도 없었던[未曾有] 나[我], 나 이후[後我] 만억 년 (동안) 한 번도 없을[未長有] 나[我]이며, 창창한 [세상] 밖에 한 번도 없었던[未曾有] 나요, 많고 많은 [만물] 중에 처음부터 없었던[未始有]의 나[我]라. 지금 소위 왕래고금[往古來今: 옛날부터 지금까지-역자주]은 내가 생겨난 이후 비로소 있게[始有] 된 역사요, 지금 소위 위[上]로 창창하고 아래[下]로 망망함은 내가 [이 세상에] 온 이후 비로소 있게 된 명사(名詞: 이름)이로다. 이를 돌이켜보면[顧此] 만물 중의 하나[萬叢裡一]로서 내[我]가 없으면, 이른바 천지(天地)라는 것, 이른바 고금(古今)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나며[何生] 소장쇠로(小壯衰老)의 시대(時代: 시간이 번갈아짐-역자주)와 성현완명(聖賢頑冥)의 자격(資格)과 안락비고(安樂悲苦)의 사위(事爲)와 일성산해(日星山海)의 세계(世界)가 또한 어떻게 생겨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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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천도교의 '자아론(自我論)' ['인간관'과는 또 다른]의 새로운 경지를 맛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는 평[조성환]이 나왔다. 이것은 '자아중심주의'를 '개벽적으로 설파'하면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개인중심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여기서 '나[我]는 진여여(眞如如)한 공아(公我)로서의 나이다. 이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찍이 의암 손병희 선생이 "운용의 맨 처음 기점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의 기점은 성천의 기인한 바요, 성천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하여 이때에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로부터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때에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끝나는 것이니라."([無體法經])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쉬운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이종린은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유학박사'로서의 경륜과 이미 1900년대부터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되고 있던 천도교에 대한 교리의 선행 이해를 바탕으로, <천도교회월보> 초기에 이런 정도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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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지난 첫 번째 모임에서는 이종린의 생애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도모하였다. 이종린은 구한말[1883] 탄생하여, 성균관박사까지 지냈으나, 국운이 기울자 1900년대에는 대한협회 등을 통한 사회운동, 언론운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그 이후 천도교 주요 교직을 역임하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물산장려회나 신간회, 무명회(일제강점기 언론인들의 투쟁기구) 등 각종 사회단체 활동에도 동분서주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종린은 천도교의 기관지인 <천도교회월보>를 비롯한 대내외[교단안팎]의 각장 매체들에 수백 편의 논설, 한시 등을 기고한 사상가이자 문필가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종린에 대해서는 구한말에서 1900년대 초기에 썼던 '신소설' '한문소설' 등의 작품의 필자로서만 언급되었다. 이것은 이종린의 생애와 활동의 극히 일부분이며, 본질적인 요소도 되지 못하는 부분이다. 이종린에 대한 연구가 이렇게 일천하고, 그마저도 왜곡되었던 것은 그의 글들이 난해한 국한문으로 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구인문학연구소-근대사상원전강독을 통해 이종린의 원전을 읽어나가면서, 무엇보다 사상가, 그중에서도 천도교사상에 해박했던 그의 사상을 발굴함으로써, 이종린 개인뿐만 아니라, 그 시기 '동학으로부터 천도교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천도교 사상의 새로운 전개 양상을 톺아 보려고 한다. 도달할 것으로 기대되는 결론 중 하나는, 그가 '지구학 천도교 사상'의 결을 인지하고 또 전개해 나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종린[을 비롯한 그 시대 주요 천도교 지식인/사상가]의 사상은 오늘 이 시대에, '미래학으로서의 동학 천도교'를 재발견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종린의 생애에 대해서는 밝혀야 할 더 많은 사실들이 있다. 그에 대해서는 맞춤한 계기에 밝히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