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동학 이야기 (2-2)
(지난호 게재분)
이 사진의 '111.9.12'는 포덕111년 9월 12일을 의미합니다. 포덕 111년은 1970년입니다. 지금부터 딱 50년 전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 한 장은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 그리고 또 천도교의 역사가 얼마나 한국 근현대사와 구비구비 얽히고 서리서리 밀착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합니다.
- 왼쪽 첫 번째 사람은 '최동희' 고려대 철학과 교수입니다.
- 왼쪽 두 번째는 군암君菴 이우영(李宇英) 전 연원회의장입니다.
- 왼쪽 세 번째는 우암愚菴 김명진(金明軫) 전 교령입니다.
- 왼쪽 네 번째는 덕암德菴 최덕신(崔德新) 전 교령입니다.
- 왼쪽 다섯 번째는 수의당守義堂 주옥경朱玉卿 사모님입니다.
8. 왼쪽 여섯 번째는 서암瑞菴 정운채鄭雲彩 전 천도교교령입니다. 1912년생이니, 이때가 59세때입니다. 이분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무인멸왜기도 사건에도 참여하였던 포암 정한영 선생의 차남입니다. 청년시절에는 청우당과 청년동맹 활동을 하고, 아버님과 함께 무인멸왜기도운동으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청우당, 천도교보국당 등의 활동을 하다가 6.25 때 월남하여 생계활동을 하시면서 천도교 종의원, 서운포 도정, 상주선도사 및 재단이사, 교사편찬위원 등을 거쳐 1988년에 교령에 취임하였습니다. 교령 재임시에 "자주통일선언"과 "통일기원심고문"을 전 교단 차원에서 진행하며 통일의 의지를 강력하게 주창하였으며, 1989년 종법사에 추대되었고, 1991년 81세을 일기로 환원하였습니다. 저서로 <인내천진리와 사인여천주의> <천도교경전해의> <천도교선교서> <무체법경해의> <자주주의사상개벽> 등을 남겼으며, 동생들인 고 정운열(전 서울교구장), 고 정운관(서운포 직접도훈), 정운벽(서운포 선도사, 1922년생, 현재 생존하여 계심)도 모두 독실한 천도교 신앙을 하신 것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 신앙에 매진하여 3대, 4대, 5대에 이르는 명문 도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과 관련한 증언을 해 준 직암 박성기 선도사는 정운벽 선도사의 아드님이며, 정운채 종법사는 '외삼촌'이 됩니다]
9. 왼쪽 일곱 번째는 무암無菴 배호길裵鎬吉 전 상주선도사입니다. 1902년 경남 고령 출신으로 1946년 3월에 복교하여 대구시교구에서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하사가 1970년경부터 서울에서 상주선도사(1971), 종학원장(1972)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0. 왼쪽 여덟 번째(맨 오른쪽)은 척암拓菴 이응진李應辰 선생임이다. 수광壽光이라는 아호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1908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으로 안주농업학교(1928)을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1932)한 재원입니다. 1924년에 입교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 천도교청년당 동경부에서도 활동하였고, 동경종리원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귀국후에 청우당 활동을 하던 중, 1934년 중국 광동 중산대학생 안병무로부터 광동군관학교에 입학할 학생을 파견하라는 연락을 받고 학생을 선발하던 중 왜경에 발각되어 6개월간 고초를 당했습니다. 1935년 공진항 이선근 등과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척하는 만몽회사 중역과 조선일보 지국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만주 공주령(公主嶺) 천도교종리원장(교구장)의 교직을 역임하였습니다. 1941년 조선민족해방연맹을 조직하여, 상해 임정 및 연해주와 연결하여 일제패망을 대처하려고 강원도를 순회 중 통천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청우당 활동을 하면서 천도교중앙총부의 체제를 정비하고 수습하는 데에도 참여하였으며, 군정체제 하에 과도입법위원청우당대표(1946), 신진당 중앙위원(1946), 청우당 부위원장(1947), 천도교보국연맹 위원장(1951) 등을 두려 역임하였습니다. 휴전 후에는 신인간사장(1955), 상주선도사(1957), 종의원 의장(1963/1967), 상임종법사(1971) 등을 역임하고 1976년 환원하였습니다.
11. 사진 2열 왼쪽 첫 번째는 화암化菴 김월해金月海 선도사입니다. 1929년 평안남도 순천군 출신, 1942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하여 반공포로로 석방되었으며, 1964년 성균관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포덕백년기념 준비위원, 천도교중앙총부 종의원), 중앙감사, 교서편찬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86년 58세를 일기로 환원하였습니다.
12. 2열 왼쪽 두 번째는 창암滄菴 박호권朴浩權 선도사입니다. 1939년 경상남도 남해군 출신으로 1958년 입교하였습니다. 천도교 남해교구와 (부산으로 이주) 북부산 교구의 주요 교직 및 북부산 교구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형님이신 박선권 [이 사진 3열 왼쪽 네 번째], 사촌인 박충남 [이 사진 2열 오른쪽 두 번째] 등과 함께 독실하게 천도교 신앙을 하였습니다.
13. 2열 왼쪽 일곱 번째는 김송자 동덕입니다. 김송자 동덕은 특별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이해 8월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 주최로 개최된 청년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차지한 기록이 신인간 <화보>에 게재되었습니다.
14. 2열 여덟 번째는 송영옥 동덕은 연암淵菴 송문원宋文源(1920년생) 전 거진교구장의 따님입니다.
15. 2열 아홉 번째는중암中菴 박충남朴忠男 현 천도교 의창수도원[봉황각] 수도원장님입니다. 1945년 경남 남해군 출신으로 일찍이 부산으로 이주하여 부산시교구학생회장(1965)과 부산시교구청년회 부회장(1970) 등을 거쳐 이때[사진 속] 종학원 제3기생(1970)이 되었으며, 교화관 관서(1974)를 시작으로 이우영 교령전서(1976), 이영복 교령전서(1980)를 거쳐 종의원, 교무관장과 종무원장 및 재단이사(2007), 도원포 도훈 등을 역임하고 2016년부터 의창수도원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청년회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특히 두 분의 교령을 수행 보좌하는 전서[비서]로서 중책을 수행한 이력이 특별합니다.
16. 2열 열 번째[오른쪽 첫 번째]는 현재 '천도교 현대사 구술'에 참여하고 있는 직암直菴 박성기朴成基 선도사입니다. 1947년 서울 출신으로 보성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졸업하고 동아출판사, 계몽사, 교원, 교학사 등 출판계에서 평생 봉직하였습니다. 최근 '동경대전' 주해서를 펴낸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기동창으로 최근까지 교유를 계속하고 있기도 합니다. 1967년부터 청년회중앙본부[상임위원] 활동을 시작하여, 청년회서울지부 부위원장(1969)을 지냈으며, 역시 이 사진 속의 주인공으로 종학원 제3기생 수료를 하고 종의원(1980-1995)을 5회 연임하며, 천도교중앙총부 운영에 깊은 통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회중앙본부 위원장(1979), 서울교구감사(1992), 종무위원(1995), 서운포 선도사(1996)를 거쳐 주식회사 체제로 개편한 첫해부터 신인간사 전무(1998)를 맡았고, 서운포 교훈(2004)과 천도교중앙총부 경리관장 및 종무위원(2004), 천도교유지재단 이사장(2013)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