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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18. 2021

제3기 천도교종학원 졸업기념-1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동학 이야기 (2-1)


1. 이 사진의 '111.9.12'는 포덕111년 9월 12일을 의미합니다. 포덕 111년은 1970년입니다. 지금부터 딱 50년 전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 한 장은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지, 그리고 또 천도교의 역사가 얼마나 한국 근현대사와 구비구비 얽히고 서리서리 밀착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합니다. - 이 사진속의 이야기는 사진속 인물 중 한분이기도 한 직암直菴 박성기(전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 위원장-2째줄 오른쪽 1번-검은테 안경/당시24세) 님과 정암正菴 주선원(전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 위원장 - 박성기 전임), 심암 이동초[동학천도교인명사전 편저자] 등과 함께 확인한 인물-이름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 사진은 신인간(279호) 포덕 111(1970)년 10월호 <화보>에 수록된 것입니다. [이분들과 함께 '구술로 기록하는 천도교 현대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


2. '종학원(宗學院)'은 천도교의 교역자를 양성하고, 재교육하는 기관입니다. 1970년대의 종학원은 '단기과정'(1개월)으로 청년 교역자를 양성하고, 중진 교역자의 재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때가 제3기입니다. 1기는 1968년에, 2기는 1969년에 진행되었습니다. 


3. 사진 앞줄 왼쪽 첫 번째 사람은 '최동희' 고려대 철학과 교수입니다. 이분은 최근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 주해서에 '고대 철학과 교수'로서 서양철학을 강의하는 도중에 한국의 철학을 간간이 강의하여,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분이기도 합니다. 해방 이후 '동학 연구'의 제1세대를 이룬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960년대]. 최동희 교수는 1925년 북청 출신으로, 천도교의 도호가 덕암德菴이고 1942년에 입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학계에 봉직하느라 천도교 신앙의 오관실행(교인의 의무)을 하지 못하다가, 1995년 삼암 표영삼 선도사의 지도로 복교식을 봉행하였습니다. 삼암 표영삼 선도사의 동학 연구에 철학적 배경을 제공해 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동학 연구의 1세댸"라는 이름으로, 최동희 교수의 연구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경, 최동희 교수가 <신인간>을 비롯한 각 매체에 발표한 동학 관련 논문을 수집하여 '저작선'을 간행하려 하였으나, 환원(2013)하는 바람에, 끝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 원고가 아직도 출판사 자료실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근대 동학 연구사" 정리를 위하여 "삼암 표영삼 저작선(현재 진행중)"과 더불어 꼭 끝마쳐야 할 일입니다.[또 다른 한 분은 '신일철 교수'입니다.]


4. 왼쪽 두 번째는 이우영. 천도교의 도호는 군암君菴이고, 역시 북청군 출신입니다.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천도교청년회 북청지회 활동과 신간회 북청지회 활동을 하던 분입니다. 1928년경부터는 북청노동조합연합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북청농민사 이사장도 지냈습니다. '북청의 천도교청년당(청우당)'은 내내 떠난 적이 없으니, 수많은 직임을 맡았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청우당, 보국연맹 등을 맡았고, 1953년 이후에는 천도교중앙총부의 감사원장, 종무원장, 연원회의장, 용담수도원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1993년 91세를 일기로 환원하였습니다.  


5. 왼쪽 세 번째는 우암愚菴김명진(金明軫) 선생입니다. 1907년 7월 24일 경상남도 남해군 출신이니, 남쪽 끝입니다. 25세 되던 1931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오랫동안 학계[남해 일대의 보통학고, 국민학교, 중학교 설립, 해성 중학교 교장, 이사장 등 역임]에 봉직하였으며, 천도교 선구교구장을 비롯하여 순의포 도정을 지내고 중앙총부의 상주선도사, 종학원장을 지냈고, 천도교의 교령(1976)까지 지내신 후에, 1989년에 천도교의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로 추대되었습니다. 1990년 9월 13일 향년 84세로 환원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한국 근현대사의 1단락 - 3.1운동 - 6.25와 월남 - 이촌향도(남해에서 서울까지)의 역사가 묻어 습니다. 그 서리서리의 설움살이는 참 어마어마합니다. 지나고 보면 슬픔도 힘이 되고, 고난도 추억이 되는 법이라지만, 그 갈피에서 순도하고 순국하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수많은 분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 이름을 찾아 한울님처럼 모시는 일, 그것이 모시는사람들-동학천도교인명사전연구팀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6. 왼쪽 네 번째는 최덕신 전 교령. 천도교의 도호는 덕암德菴입니다. 최덕신 교령은1914년 의주군 출신으로, 조선 독립군 양성 학교로 자리매김하였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1936)하고, 광복군으로 복무하면서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1948년에는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고, 1949년에는 미국 육군종합학교와 포트베닝보병학교를 졸업하였으며(1960.6), 6.25 전쟁당시는 제1군단 참모장 및 사단장, 육군보병학교장, 그리고 6.25정전회담 당시에는 미극동군총사령부 파견 한국대표 및 정전회담 한국군대표(1952-1953)년을 맡았습니다. 1950년대 말까지 주요 군 보직을 역임하고 전역한 후에는 베트남(월남) 공사돠 대사, 외무부장관, UN총회 한국 수석대표(1961), 서독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967년 재임중 환원한 신용구 전 교령의 후임으로 천도교 교령에 추대되어 재선까지 하였으나, 교회 분규 및 박정희의 견제로 미국으로 출국-망명(1977)하였다가, 1981년 북한으로 월북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도교청우당중앙위원장" "조선천도교회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 "조선종교인협회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에 환원하였습니다. 최덕신 교령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한때 김일성이 재학하던 만주의 "화성의숙" 교장 최동오의 아들로서, 최동오의 묘소는 현재 북한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고, 최덕신의 묘소 또한 그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는 최덕신의 아들 '최인국' 선생이, 생전에 최덕신이 그리고 그이 사후에는 그 부인 류미영(류동렬 장군의 따님)이 맡았던 직위를 그대로 물려받아 재임하고 있습니다.  


7. 왼쪽 다섯 번째는 '주옥경' 사모님입니다. 알다시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인(세 번째)입니다. 그의 천도교 도호(당호)는 '의암 손병희 선생을 지키는 분'이라는 뜻의 수의당守義堂'입니다. 주옥경 사모님은 아는 바와 같이 '기생' 출신입니다. 그러나 한번 의암 선생의 부인이 된 이후에는 해박한 사회적 경륜을 발휘하여 의암 손병희 선생이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천도교단의 체제를 정비하는 일에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이분은 별도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암 선생 사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1926년에는 '천도교여성회'를 창립하여 해방 이후까지 수십년 동안 '회장'과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천도교 근대 여성운동의 살아 있는 전설로서 역할하기도 하였습니다. 만년에는 이 사진을 찍은 '우이동' 봉황각에 기거하면서 의암 선생의 정신을 수호하였고, [우이동 봉황각이 천도교의 수도장인 고로] 봉황각을 찾는 많은 분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시는 사모님[師母]으로서, 지주 역할이 되어 주셨습니다. 


(계속) -- 이 이야기는 위 사진 속 인물의 85%정도에 걸쳐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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