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서쪽 하늘을 닮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들이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한데 뒤엉켜 아우성치는 밤에 이삿짐을 싼다.
옷장 속에서만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소심한 잠바와 더 이상 새벽을 향해 뛸 수 없는 나약한 운동화, 민들레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는 옹졸한 화분, 안부전화 한 통 할 수 없는 불통의 전화기, 이런 것들을 버린다.
잔뜩 먼지 먹은 책 속에 숨어있는 낡은 문장과 냉장고 속 검은 비닐봉투에서 상해버린 짓무른 희망들, 눅눅한 어둠 속에서 갈수록 난폭해지려는 기다림, 이런 것들을 비운다.
짐을 싼다는 건
버려야 할 것을 버린다는 것
버린다는 건
아쉽도록 비운다는 것
비운다는 건
여백을 주고 투명해진다는 것
울림통 깨진 기타 같은 나의 시들을 폐기물 딱지 붙여 던져 놓고는 맑은 소주 한 잔 카 하고 털어 넣으니 뉘엿뉘엿한 보따리와 시름 가득 찬 박스 사이에서 내장까지 훤히 비치는 가난한 짐짝 하나 굴러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