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다비 Dec 18. 2024

엄마가 내게 남긴 선물

엄마는 이전에도 자주 신변정리를 했다. 그럼에도 정리하지 못하고 남겨두고 떠난 것은 그만큼 엄마가 사랑한 물건들이기도 했다.


엄마는 자기 장례도 모른 체한 그 교회 사람들을 정말 사랑했다. 엄마 휴대폰에는 거의 모든 게 이미 지워져 있었다. 통화기록도 문자도. 사진 또한 많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 사진이 조금 있었고, 남은 대개가 그 교회에서 훈련받고 프로그램 참여한 사진들이었다. 목사님 책을 사고 사인을 받으면서 엄마는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그 교회 사람들이 조문은 온 적 있었다. 처음 뵙는 분이었지만, 보는 순간 알았다. 아, 이 분이구나.

엄마가 되고 싶어 한 모습 그대로였다. 답을 다 안다는 듯한 태도와 마음을 꿰뚫어 보는 기분을 주는 눈빛. 강력한 리더십. 숏커트. 여자 목사님. 그러나 나는 무당과 두목 그 어디쯤의 느낌을, 그분에게서 받았다.


엄마가 마지막까지 정리하지 못하고 남겨두고 간 물건들을 통해 엄마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집에는 무슨 고미네랄 해양심층수 소금, 관장을 하는데 쓴다는 커피와 관장도구들, 환부에 뜸을 뜨는 도구들, 진물에 사용할 거즈, 기함할 만한 고가의 참숯팩, 심부체온을 올려 준다는 원적외선 기계, 기저귀 등이 쌓여있었다. 얼마나 많았는지, 방 하나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몸부림의 흔적들이었다.


엄마는 대학병원 교수님들을 싫어했다. 제약업체와 손잡고 환자들한테 몹쓸 약을 쓰는 족속들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병이 낫기를 바랐다. 장로라던가 박사라던가, 미국에서 한의원을 한다던 어떤 분을 엄마는 맹신했다. 헬로우 나이스투미츄 정도의 간단한 회화도 모르면서 그분께 치료를 받으려고 혼자 30인치 캐리어를 끌고 3주간의 미국행을 감행했다. 막상 가보니 사모님이 정신이 이상하시다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엄마가 나에게 그분에 관해 소개하기를, 아토피부터 시작해서 자폐도 고치고, 너 그 자궁내막증 그것도 이분이 수술 없이 다 고칠 수 있대! 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대단한 의술이 있는데 사모님의 불안증 하나 못 고쳐서 그러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엄마를 반드시 고칠 수 있다며 보름에 기백만 원씩 뜯어가던 그 박사님은 엄마의 부고에 묵묵부답했다. 양심 없는 돌팔이 새끼.


또 엄마는 목사님의 작은 흠결도 못 견뎌했다. 6-7년쯤을 주기로 교회를 옮겼는데, 내가 결혼하고 난 뒤로 그 주기는 2-3년으로 더 짧아졌다. 통화하면서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일어난 일 등을 얘기하면 엄마는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목사들에 대해서는 “다 코 처박고 회개해야 한다”고 비난했고, 교회 시스템 자체를 불신했다. 직분 제도를 싹 엎어버려야 된다고 주장했다. 체 게바라의 혁명정신도 울엄마 못 따라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교수들은 제약회사의 끄나풀들이고. 목사들은 다 삯꾼들이고. 엄마는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이런 모습과, 휴대폰에 남겨진 사진 속에서 엄마의 결핍을 보았다. 엄마는 아마도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았다. 그 교회에서 뭐를 이수하면 학사모를 씌워주고 사진을 찍나 보다. 사진 속에서 엄마는 내가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 신난 아이처럼 수줍고 행복해 보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엄마는 ‘유치하게’ 학사모를 쓰고 사진 찍지 않겠다고 하셔서 나만 가운과 학사모를 입고 엄마 아빠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내 앞에서는 학벌에 대한 미련 따윈 전혀 없는 듯 행동하셨지만 은근히 학력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고, 자기는 못 배웠어도 너희들보다 훨씬 낫지 하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다. 항상 말머리마다 붙였던 말, “주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된다. 그 말은 엄마를 특별하게 만드는 무기이자, 그녀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방어막이었던 것이다.


나는 신뢰하고 좋아했던 사람마다 엄마가 박살을 내는 통에, 늘 불안하고 맘 붙일 곳을 몰랐지만, 그래서 혼란형 애착을 갖게 됐지만, 그만큼 감정적 민감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서 이렇게 항상 혼자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랜 덕에, 글쓰기가 늘어 조만간 책 출간도 하게 되었다.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엄마가 남긴 물건들 속에서 나는 그녀의 고통과 갈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기대와 결핍은 어쩌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늘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고, 나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혼자 해결하려 하는 내 모습이 그녀를 닮은 것 같아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엄마가 보여준 리더십과 강력한 신념은 나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기준도 만들어주었다. 엄마의 유달리 똑 부러진 믿음은 내가 그녀를 이해하려 애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나는 그를 감당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그렇게 이해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싸워왔던 세상,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 엄마 덕분에 나는 독화살을 맞고 피하며 말조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본인이 말한 대로 되는 엄마를 바로 옆에서 보며 말의 권세를 체감했다. 맨날 영적인 이야기만 하는 엄마가 지겹기도 했지만, 그녀 덕분에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게 됐다.

결국,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나의 불안을 글로 풀어냈다. 글은 내게 치유의 방법이었고, 글을 통해 나는 세상과 나 자신을 다시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이제, 을 쓰는 것은 단순히 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모든 감정과 결핍을 풀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엄마의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그녀의 삶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궁하다. 엄마는 생 전체를 내게 자양분으로 주고 떠나셨다. 이제 이 교훈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나의 몫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점점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동안 움켜쥐고 있던 불안과 결핍을 내려놓고, 나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나누는 것이 내게 주어진 새로운 선물인 것이다.

엄마와 나는 겉모습은 사람들이 놀라도록 닮았을지 모르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부고문자를 돌리며, 엄마와 나의 세계가 이렇게나 멀어졌음을 실감했다. 공통지인이 10%도 되지 않았다. 이전에 엄마의 세계는 곧 나의 세계였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엄마가 남긴 물건들, 그 속에서 나는 내 이야기를 찾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