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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의 고통에 대해서...?

살다 보면 그럴 때 있잖아요. 그냥 정말 힘들고 화가 날 때...

by 심색필 SSF

살다 보면 정말 별의별 일들이 다 생긴다. 좋은 일도 열받는 일도. 그러나 살다 보니 행복하게 웃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비율은 대략 2대 5 정도가 되는 것 같다. 평일과 주말의 비율정도?


사실, 오늘도 약간 열받는 일이 있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프로젝트를 함께 잘 이끌었으며 서로에 대해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렸는데 불과 하루 만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윗사람의 한마디에 일을 싸그리 갈아엎는 듯한 일이 발생했다. 뭐...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 본 일일 것이다.


군복을 입은 호랑이 대장의 명령에 따라 군복을 입고 있는 여러 북극곰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삽을 들고 산을 깎고 있다..jpg


“크흠... 부대가 너무 구형이야. 좀 세련되게 할 수 없나?”
“네.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에 산을 깎았던 사단장처럼 살면서 종종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이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을 살아온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군대만 나오면 ‘이제는 그런 일은 없겠지.’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세상이 그냥 위수지역이 없고 철창이 없는 군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갑질이야?”

“갑질이라고 하기 전에 돈값은 제대로 해라.”


갑질과 돈값의 차이는 무엇일까? 돈을 준만큼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한 사회인 것 같으면서도 같은 가격에 더 좋은 품질과 양을 가지고 오는 자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내 실력이 부족한 것 같으면서도 짜장면값을 내고 맛보기로 당연하게 탕수육 몇 조각을 달라고 하는 게 맞는 이치인가 싶다.

“그렇게 잘 알면 우리가 했죠.”
“원래 이 업계가 다 그래요.”


갑과 을. 서로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문장이지만 누가 빌런인지 알기 힘든 세상이다. 내가 이 세상에 도태된 건지 아니면 이 세상이 너무 높은 허들을 요구하는 건지 도통 그 기준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아... 200만원 가지고 한 달을 어떻게 사냐?”

“200만원이면 뭐 그래도 먹고는 살지.”


한 남자는 바다 위에서 튜브를 타고 웃고 있지만 바로 옆의 다른 남자는 물건이 많이 쌓인 뗏목을 저어가며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있다.jpg


같은 단위 앞에 붙은 숫자라는 전 세계 만국공통의 언어. 200만 원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만 누군가에게는 턱없이 적은 돈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래도 살만한 단어이다. 똑같이 물에 뜰 수 있다고 해서 다 같은 무게를 감내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튜브 하나만 있어도 머리 위에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여유만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가족이라는 무게와 학자금 대출, 병원비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지각색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통배 하나가 있어도 하루하루가 벅찰 것이다.


“야. 그래도 너무 짜증 내지 말아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 일단 좋게 생각해.”


화가 나고 마음이 힘들 때 종종 주변을 향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분출한 적이 있다. 도저히 속으로 이 화를 삭이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많이 망가질 것 같아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입에 담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뭐 어떻게 해? 이미 벌어진 일인데?’라는 말을 들을 때 사실 위안이 되기보다는 ‘나는 멘탈도 쓰레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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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보라! 데보라 ]


‘보라! 데보라’라는 드라마를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을 통해 스스로의 아픔을 위로하려 든다는 느낌의 대사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이 다르듯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 불행의 기준도 다르기 마련인데 뭔가 그 기준을 잡을 때 ‘나보다 더 힘든 인간들도 있는데 그냥 살아보자.’라는 류의 말이 조금 더 효과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러면서 점점 더 힘든 사람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서 내 기준과 주변의 환경이 조금씩 더 하향평준화가 되어가는 것 같다.


“아이. 요즘 결혼을 어떻게 해요? 애 낳으려면 돈이 얼만데.”
“딩크도 이제 뭐 옛말이죠. 싱크라는 단어가 나온 지가 언젠데.”


매운맛에 빠지면 슴슴한 맛은 점점 더 찾기 힘들다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SNS에서도 요즘은 점점 더 매콤한 사연들이 가득한 주제로 가득한 것 같다. 뭔가 누군가의 행복을 듣는 건 이제 좀 지친 듯한 느낌이랄까? 누군가가 잘 먹고 잘 사는 느낌보다는 누군가가 파멸에 다다른 느낌을 조금 더 선호하는 느낌이다.

인공색소와 설탕물을 얼린 2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만연하던 그 시절과 무인 아이스크림 점포가 대량으로 늘어난 현세대는 분명 기준이 많이 다르다. 심지어는 그 기준을 표시하기 위한 단위도 많이 바뀌었다. 백만장자라는 옛말은 이제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고 건물주라는 이름은 이전 같은 위용을 내비치지는 못한다. 천년동안 힘을 숨긴 괴수가 나타날지언정 핵무기를 가진 인간이라는 빌런을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 요즘 '나'라는 인간에 대한 사회의 기준과 단위는 어릴 적 나에 비해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커다란 은하계가 손톱만한 지구를 보면서 코웃음을 치고 있따.jpg


아무리 발버둥을 치며 우리가 더 나아지기 위한 삶을 살아가더라도 전 우주적 시점에서 보는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는 먼지보다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디작은 먼지들은 주변의 먼지보다 조금 더 나은 먼지가 되겠노라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며 남들은 신경도 써주지 않는 스트레스를 계속해서 축적한다.


“왜 하필 저런 인간들이랑 같이 일을 하게 돼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지...”


인간이라는 존재로 태어나 계속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만 하는 삶을 살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게 우리의 운명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와 함께 일을 하며 힘을 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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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놓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지금 너의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야.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


그 엄청난 확률로 당신을 만났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차라리 벼락을 맞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라 불리고 운명이라 불리는 존재가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당신을 보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정도의 사람을 만난 것도 그 엄청난 확률의 행운이겠지. 다른 세계선에서 만약 내가 상사로 싸이코패스를 만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폐컨테이너 박스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한다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나를 부러워하지 않을까? 뭐... 고통의 기준도 다 다른 것이니까.


쓰다 보니 좀 난잡하게 글을 쓴 것 같은데... 그냥 조금... 한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픈 사람을 보며 위안을 삼기보다 주변의 기준에 눈을 두지 말고 그냥 다시 웃으면서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서... 그래서 한 번 끄적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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