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텃밭_2月
온기가 없으면 쉽게 무너진다
앞으로 가꿔나갈 밭에는 십몇 년 동안 방치된 창고가 있다. 이미 무너졌고 골조가 훤히 드러나있다.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편찮아지시고 돌아가신 이후부터 전혀 관리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함께 무너진다.
‘조금 더 자주자주 왔었더라면...’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할아버지 텃밭이 있는 마을은 나의 유년시절을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끔 이 동네를 산책할 때면 아빠가 만든 노란색 창문, 비 오는 날 노래를 부르며 그리던 해골바가지, 바닥에 떨어진 달달한 살구, 봄이면 온종일 콧속을 매우던 아카시아향, 담장에 핀 나팔꽃을 불어댔던 날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대부분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릴만한 것들이 아직도 남아있을 정도로 큰 변화가 없는 이곳이다.
그러나 여전하리라 믿었던 것들도 세월 앞에서 장사 없는 것이 있었다.
시간은 참으로 무정하게 흘렀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집, 할머니와 함께 살던 도시에서 온 숫기 없는 소년이 살던 앞집 그리고 아카시아향이 유독 진했던 옆집이 모두 무너졌다. 동네할머니께서 지난 밤 '쾅'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고 하셨는데 그게 바로 집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아무도 살지 않으면 점차 온기를 잃게되고 빈집은 하룻밤사이에 쉽게 무너지는 지경이 된다.
몇 년 전, 나의 고향 강화도는 인구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지역이 이곳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지역인구소멸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일자리 부족으로 큰 도시를 향해 고향을 떠나는 청년들, 수도권 블랙홀 현상, 지역의 초고령화 등 문제로 인해 점점 지방의 작은 마을들은 생기와 따뜻함을 잃어가고 있다. 강화도는 수도권에 포함되어있어도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순 없었다.
언젠가 나라는 존재가 시작된 이곳이,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버려진 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래서 지금까지 외면했던 시간의 잔해들을 조금씩 치워보기로 했다. 그리고 향기로운 허브와 꽃들로 긴 시간 공허했던 이곳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보려한다. 내 추억이 깃든 곳을 지금도, 또 앞으로 쌓여갈 날들과 오래오래 함께하기 위해서.
골칫덩이 플라스틱
입춘을 하루 앞두고 밭 주변을 하나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창고에는 망가지고 기능을 잃은 물건들이 가득이었지만 그 안엔 꽤 쓸만한 농기구들이 숨어있었다. 모든 물건을 밖으로 꺼내 쓰레기를 분류하고 처리하는 데에만 이주가 넘게 걸렸다. 본격적으로 밭을 만들기도 전에 쓰레기부터 치워야 하는 현실이 야속했지만 앞으로 계속 가꿔나갈 공간인 만큼 정성을 들여 치웠다.
많은 양의 쓰레기를 치우다 보니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절로 생긴다. 가장 골치 아팠던 것들은 플라스틱인데 어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썩지도 않고 그대로다. 그러나 천장이 뚫린 창고 안에서 더위와 추위를 수십차례 겪고 나서 인지 멀쩡해 보였던 플라스틱도 만지는 순간 바사삭 부서진다. 비닐도 마찬가지다. 큰 쓰레기보다도 부서진 작은 쓰레기 조각들을 줍는 것이 더 어렵다.
땅 속에는 유리가 한가득이다. 그 유리는 오래전 묻힌 것들이라 재활용 마크도 없고 버리기도 까다롭다. 그마저 모두 깨져있어서 마대자루에 담은 후 불연성 쓰레기봉투에 넣어 따로 처리해야한다. 어떻게 버려야 할지 몰라 인터넷에서 찾아도 보고, 읍사무소를 방문하기도, 환경미화원분들께 묻기도 했다. 이때 알게 된 사실은 지역마다 봉투도 다르고 버리는 법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한 번 더 깨닫는다. 난 참 모르는 게 많다.
사람 손이 무섭다
추운 날씨가 지속됐지만 참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살면서 이렇게 많고 다양한 쓰레기를 치웠던 날이 있었나.
2월을 꽉 채우자 ‘사람 손이 무섭다’는 말처럼 밭 주변은 어느새 놀랍도록 깨끗해졌다. 그야말로 밭의 환골탈태. 오며 가며 보시던 동네어르신들도 너무 보기 좋다고 한 마디씩 건네신다. 오랜 시간 이곳을 지나다니시면서 그 험한 꼴을 계속 보셨을텐데 할아버지께도 또 동네분들께 너무 죄송스럽다. 진작 했으면 좋았을 일을 이제서야 하다니 말이다. 그래도 오랜 흉물은 치웠으니 마음의 짐은 조금 덜어낸 듯 하다.
이제 밭을 만들면 되겠지 하는 마음에 호기롭게 삽으로 땅을 파보았으나 손이 아프다.
아직 땅은 꽁꽁 얼어있다.
지방소멸에 관한 추천 영상들
<하나뿐인 지구 - 어쩌면 사라질 당신의 고향에 대한 기록> 중 일부, 2016, EBS
<현지인브리핑> 이탈리아 카스텔포토관련 영상, tvn, 2023
<다큐 공작소 - 빈집 이야기>, KB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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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힙스터]
"태어난 곳은 시골, 내 꿈은 힙스터"
시골의 일상을 그리고 담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과 마음이 따르는 행복을 실천하는 진정한 힙스터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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