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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래 Aug 19. 2024

본성을 찾아가는 '종소리'

싱일볼 하나를 책상 위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치는 이유

종을 치면 불교와 연관 짓는다. 절에 가면 소리 나는 것들이 많다. 종이 대표적이다. 추녀 끝의 풍경에서도 소리가 나고 목탁도 그렇다. 그래서 불교는 소리의 종교다.


불교만 그럴까? 모든 종교에서는 종을 친다. 지금이야 듣기 힘들어졌지만, 성당과 교회의 종탑에서 종이 울렸다. 근래까지 우리나라 시골 예배당에서는 종을 쳤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으로 유명한 동화작가 권정생도 시골교회 종지기였다.


김승덕이란 가수가 부른 '아베마리아'란 오래된 노래가 있다. 도시에 살며 한참 회사생활을 열심히 할 때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노래다. 노래방이 유행하기 전, 스탠드바란 술집이 있었다. 홀 한쪽에 무대가 있고 손님들은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취기에 아베마리아를 부르고 앙코르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술맛 떨어지는 노랜데 그땐 그랬다.


그 노래에 "나를 지켜주는 성당의 종소리"란 가사가 있다. 성당의 종소리는 사람을 지켜주었다.


그만큼 종교와 종소리는 뗄 수 없는 사이다. 불교만 종을 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깨우침의 종교는 종을 쳤다.


왜 종소리가 사람을 지켜주고 위안을 주며 깨달음을 주는 걸까? 그건 본성을 찾아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천둥소리나 총소리 같은 것은 순간이다. 우르르꽝, 탕탕 등 여운이 짧다. 종소리는 다르다. 뎅뎅뎅, 여운이 길다. 일상생활을 하다 천둥소리나 총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이 멈춘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다. 아니 못 한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멈추는 순간이다. 그 찰나가 본성인데 깨닫지 못한다.


종소리는 어떤가? 좀 길다. 뎅 하고 친 후에 여운이 길게 간다.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를 따라간다. 종소리의 여운을 따라갈 때는 다른 생각을 멈출 수 있다. 나도 모르게 나의 본성을 더 길게 마주하는 순간이다. 이런 생각으로 종소리를 들어보면 달리 들릴 것이다. 


싱잉볼 하나를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지나다니며 한 번씩 습관적으로 울리고 종소리를 끝까지 따라간다. 깨달음은 둘째치고 마음이 편안하다.





내 의지를 내어 생각할 수 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잘 계시는지 생각할 수도 있고, 군대에 간 아들이 뜨거운 날씨에 훈련은 잘 받고 있나도 생각할 수 있다. 퇴근 후 식사를 하며, 오늘 회사에서 했던 일을 생각할 수도 있다. 무엇을 잘했는지 못 했는지도 생각할 수 있다. 사장이 툭 뱉은 얘기를 떠올리며 속에 담긴 진심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옆자리 동료는 왜 그 말을 나한테 굳이 했을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이 더 많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각들이다. 순간순간의 생각을 챙겨보자. 얼마나 많은 생각들로 순간을 살고 있는지를 알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각들은 수천수만 갈래로 일어난다.


특히 슬픈 생각, 두렵고 불안한 생각, 화나는 생각 등 나쁜 생각들은 내 의지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일어난다. 10초 후에 일어날 생각 20초 후에 일어날 생각을 모른다.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없다. 단지 일어날 뿐이다. 거기에 끄달려 가면 한도 끝도 없이 괴롭다.


일어나는 생각들을 딱 끊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슬프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화내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은 없앨 수 없다. 그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올라온 생각을 알아차리면 된다. 명상이다.


슬픈 마음이 일어날 때, 화가 날 때, 누구를 미워하는 생각이 들 때, 남에 것이 탐날 때, 그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거기에 매달리지 말고 그냥 보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마음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산다. 그래서 사고를 친다.


그렇게 흘러 보내면 나도 모르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나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생각은 일어난다. 그렇다면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가 누구인지 의심하고 찾아볼 수도 있다.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일어난 생각을 알아차리는 주체는 또 누굴까? 그게 혹시 나일까?


그게 나라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들여다보며 화나고, 슬프고, 불안해하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일까? 뇌가 그러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그 모르는 것이 ‘본성’이다. 본래 자리, 본래면목, 참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게 아닐까? 누구는 배경자아라 하는 그 자리가 본성이 아닐까?




‘삼일신고(三一神誥)’라는 글이 있다. 단군 이전부터 우리 민족 고래로 내려오는 가르침이다. 논란이 많은 텍스트지만 긍정적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주와 지구, 인간의 진리를 담고 있다. 읽기는 쉽지만 그 내용은 심오하다. 모두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이해했다고 여기서 설명할 수도 없다.


삼일신고 내용 중에 ‘자성구자(自性求子) 강재이뇌(降在爾腦)’란 표현이 있는데, 직역하면 ‘스스로 본성을 구하는 사람은 이미 뇌에 내려와 있다’다. ‘사람의 본성은 이미 뇌에 내려와 있다’ 또는 ‘사람의 본성에는 신성을 가지고 있다’로 풀이한다. 본성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걸 찾아야 한다.


본성을 찾는 것이 수행이고 명상이다. 방법 하나가 종소리를 듣는 것이라 생각한다.


"데엥~"하는 종소리를 따라가 보자. 굳이 따라가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가게 된다. 그때 다른 생각들은 없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잠시 멈춘다. 그렇게 멈추기를 자주 하다 보면 언젠가 본성이 보이지 않을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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