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지쳤어요 땡벌 땡벌
우리집 뒷 편에는 단풍나무가 두 그루 심겨져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집주인 Kevin이 '테이블에 앉아 피크닉도 가끔 즐기기 좋다'며 어지간히 자랑을 했었다. 아니 이런 누추한 곳에서 내가 점심을 먹겠냐 이말이다. 흥!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 적응을 해서 그런가, 이 정원(이라기에도 민망하리만치 낡은 뒷뜰)에 어느 새 정이 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냥 작은 모양 조명을 가져다가 설치한 것이었다. 낮동안 태양광을 받아 충전된 전지로 밤 시간에 여러마리의 무당벌레가 반짝인다. 칙칙한 정원에 감성 한 스푼을 주고 싶었는데 나름 흡족하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허전하여 식물을 구해다 하나씩 하나씩 심기 시작했다. 언제 싹이 나올지 모르지만 양귀비 씨앗도 구해 뿌리고, 상추도 조금 심고, 레터스는 씨앗을 구해다가 잔뜩 뿌렸다. (패브릭 스왑 마켓 편 참고 :)
사실 기대는 없었다. 한참을 비가 없었기도 했고, 나라는 사람은 식물 킬러로 유명한... 선인장 마저도 말려죽이는 종류의 인간이니.
그래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한참을 거세게 내린 다음날 아침, 정원에 나가보니 이 녀석들이 벌써 촘촘하게 잎을 내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냥 싹이나 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살그머니 잎사귀를 넓히며 제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모양이 여간 대견한 게 아니다. 야생 딸기 모종도 어느새 딸기가 오통통, 붉어지고 있었다!! 기특해라.
식물들이 생기니 곤충들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파리, 모기도... 작은 벌들도 가끔 드나들고 나의 행운의 상징 범블비(호박벌)도 가뭄에 콩 나듯 단풍 나무를 구경하러 들렀다.
데이비드 아텐보로 경 이라고, 올해로 나이가 무려 99세가 되신 할아버지, 아니 학자님이 계신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재천 교수님 같은 분이랄까? 잠깐 설명을 곁들이자면 아래와 같다.
본명: 데이비드 프레드릭 애튼버러 (David Frederick Attenborough)
직업 : 방송인, 자연학자, 동물학자
학력 :
(지질학, 동물학 / M.A.) (1947년)
국적 : 영국
아니 99세의 나이면 장수만세 같은 TV프로그램에서나 뵐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으나 너무도 활발하게 방송계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대단한 에너지이다. 영국에 와서 이 분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최근에 본 애튼버러 경의 짧은 영상에서 June, 그러니까 6월이 꿀벌들에게 가장 힘든 달이라는 이야기를 접했다. 먹을 것도 없고, 가물고... 그래서 집 귀퉁이에 설탕물을 조금 담아 놓아두면 이들이 마시고 기운을 차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오.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설탕물을 가득 담아 정원에 놓아두었다. 혹시나 빠져서 나오지 못할까봐 사다리 역할을 하라고 숟가락도 하나 넣어두었다. 사려깊은 나.
흥얼거리며 아침마다 나와서 확인 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딱히 벌들이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더 솔직히 이야기 하면 나의 설탕 카페는 그야말로 '파리 날렸다'. 가끔 파리만 오갈 뿐 내가 먹이고 싶은 벌들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상권 분석이 잘못되었나..
그러던 어느날! 벌이 한마리 날아들더니 설탕물로 직진했다! 나는 너무나 흡족하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물론 물리는 건 싫으니까 조금 떨어져서. 배를 꿀렁꿀렁 하면서 설탕물을 마시고 있는 그 자태가 어찌나 귀엽던지.
한국에 있을 때 3-4년 전인가? 도시 양봉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져 예전만큼 무섭거나 공포스럽진 않다.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 그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벌들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는 이야기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카페는 빠르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설탕물단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얼마나 손님이 많이 오나 보았는데, 어림잡아 10분에 6-8명은 무료 설탕물을 즐기고 돌아갔다.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었다면 못해도 일주일 치 밥값은 충당했을 터다. 그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어디서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바톤터치를 기가 막히게 해가며 벌들은 설탕카페를 들렀다. 그런데 아니, 이 두 녀석이 먹으라는 설탕물은 안 먹고 자꾸 애정행각을 하는 거다. 이녀석들아! 그러라고 있는 카페가 아니야! 나는 괜시리 심통을 내며 훠이훠이 해 보았지만 떨어지지 않고 계속 부웅부웅 거리며 서로에게 달라붙는 그들의 사랑은 강력했다. 그리고 나는 포기 했고.
(나중에 알아보니 이 시기에 보이는 말벌들은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한다. 그, 그럼 퀴어 인건가... 존중할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