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에게 북유럽 - 아르장, 스톡홀름
나와 연두가 물안개가 피오르가 왔다가는 풍경 한상 차림이 마음의 포만감을 주었던 나라. 자작나무 곧게 뻗은 몸매 사이로 솟은 푸른 목초지가 일가족을 이루고 소들과 양들이 들판을 채워주던 나라. 초록의 감자 잎들과 밀밭이 손잡고 물결치던 나라. 두 번은 올 수 없는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생각했나 보다 그냥 좋았어. 행복했어. 이게 삶이고 여행이야. 저 구름처럼 날고 싶고 오르고 싶었던 날들에 대한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해 준 나라. 7월의 야생화처럼 청초한 바람과 흩어지는 파문은 여행자의 가슴을 떨림으로 물들인 노르웨이여 안녕.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동화 『말괄량이 삐삐』, 『닐스의 신기한 여행』으로 스웨덴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한 셀마 라겔뢰프와 영화화된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그리고 이태리 산레모별장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알프레드 노벨 「다이너마이트」의 나라 스웨덴.
백야의 여름이 어떻게 도착해 있을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밤이 하얗게 내리고 있는 스웨덴의 아르장 호텔. ‘해가지지 않아 하얀 밤 /사랑이 너무 밝고 눈부셔 /눈을 감고 돌아섰다’고 백야의 사랑을 노래한 양정훈 작가의 표현처럼 어둠이 오지 않아 밤의 마트 간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다는 친구와 유럽에 오면 꼭 먹었던 맛을 잊지 못해 납작 복숭아 산다.
프레이케스 톨렌 트레킹 때 먹으려고 아끼다가 물러 터져 먹지 못하고 버려야만 했던 납작 복숭아. 단단함이 무기였던 복숭아가 시간에 익어 물컹해지는 것처럼 슬픔도 세월에 익으면 물컹해져서 버릴 수가 있겠지. 그럼 나도 그렇게 달달하게 익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노르웨이 산악지대를 벗어나니 끝없는 푸른 밀밭이 풀어내는 서술에 잠시 동참한다. 세상의 모든 저녁이 없었던 나의 삼십 대. 만지면 부서질 것 같았던 나의 사십 대. 보푸라기 가득 일어난 스웨터의 올 풀린 실처럼 바삭거렸던 나의 오십 대. 이제 버릴 것도 주워 담을 것도 없는 나의 육십 대는 차창 밖 솜사탕 둥실둥실 떠있는 구름 같다.
이곳에서 맞이한 내편 아닌 남의 편 기일이자 나의 날. 내가 나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영원한 남의 편 제사 챙기지 못해 미안하다고, 대신 푸른 밀밭 사이로 붉은 토끼풀꽃 꽂아 구름이 만들어 내는 백설기 시루떡 조각조각 파란 하늘이 펼쳐놓는다. 잠시 쉬어가라며 휴게소 6개의 깃발이 촛불처럼 펄럭거리며 축하한다고 잘 살아왔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대 도시 스톡홀름 바사박물관은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야심작으로 재위 시 건조하였으며, 1628년 8월 10일 첫 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호가 전시된 곳이다. 흐린 날씨 뚫고 박물관 들어서면 더 큰 어둠과 당장이라도 밀고 나올 듯 바사호의 웅장함에 놀란다.
‘바사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17세기 선박으로 수 백 개의 조각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원형의 98%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국어 안내 팜픔렛은 설명하고 있다.
발트해 통행세 문제로 폴란드와 전쟁 중이었던 구스타브 2세는 강한 해군과 전함의 필요성을 느끼고 가장 크고 견고한 전함을 3년에 걸쳐 만들었으나, 무리하게 무기와 선원을 실은 바사호는 해안에서 1km도 나가지 못하고 돌풍에 균형을 잃고 침몰했다. 적량을 초과한 것이 침몰의 원인으로 바닷속에 333년이나 잠들어 있다 구조된 바사호는 아돌프 왕의 욕심이 부른 화이지만 당시 사용했던 무기, 대포, 선원들의 유골과 소지품, 생활용품, 배의 장비, 유물유적이 전시된 박물관은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졌다.
노벨상 기념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사를 가이드 투어 신청하지 않아 청사 밖에서 그냥 논다. 담쟁이넝쿨 감싸 안은 건물에 고딕과 비잔틴양식의 창문 안을 기웃거리며 아치형 기둥 사이로 펼쳐진 멜라렌 호수를, 800만 개의 벽돌의 건축물과 스웨덴을 상징하는 3개의 왕관이 장식되어 있는 106미터의 높이 탑 꼭대기 눈 흘기며 재미있게 즐긴다. 이렇게 주어진 자유는 짧아서 달콤한 걸까.
이곳에서는 한 번쯤 길을 잃어도 좋을 좁고 오래된 골목 감라스탄은 숨겨진 예스러움이 많다는데 골목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다 보면 이야기 한 소절 나올까. 스톡홀름은 감라스탄으로 시작해서 끝난다고 할 정도로 중세 건축물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스웨덴 왕궁 앞 칼 요한 14세의 동상 옆으로 왕궁 근위대 교대식이 있는지 열 지어 근위병 지나간다. 구스타프 3세 오벨리스크를 건너고 대성당을 지나 피바다 사건이 일어났던 스토르토르예트 광장 주변 상점들 구경한다. 여행지에서 쇼핑은 언제나 신이 난다. 기념으로 스칸맘 행주도 산다.
스토르토르예트 광장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가 맺은 칼마르동맹으로 덴마크는 스웨덴에 높은 세금과 독선적인 통치를 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고 저항하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스웨덴 귀족과 시민 100여 명을 이곳에서 처형하게 된다.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었으나 지금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건물들로 가득하다.
핀란드 교회 뒤쪽 건물에 가려져 찾기 힘들지만 ‘달을 보는 소년’으로 알려진 ‘아이언 보이’는 스웨덴 예술가 리스 에릭슨이 1967년에 만든 동상이다. 스톡홀름 항 부둣가에서 선박 짐을 나르던 고아소년은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이 골목 어딘가에서 숨졌고 소년을 추모하는 청동상을 세웠다. 우리의 소녀상처럼 겨울에는 털모자에 목도리를 둘러준다는데 여름이라서 맨몸이다. 소원을 빌며 놓고 간 동전들이 흩어져 있다. 우리 동전 500원짜리와 사탕 한 알 한국인이 소원을 빌고 갔나 보다.
바이킹 라인 크루즈 탔다.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스톡홀름답게 운항 중인 크루즈 저녁 뷔페 시간 바다는 섬과 섬끼리 줄다리기하고 있다. 해가지지 않는 크루즈 선상에서의 낭만? 그런 거 없다. 장시간의 버스와 도시 관광은 피곤을 가져오고 크루즈 탐색보다 씻고 쉬기에 바쁘다. 물론 크루즈 즐기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이 거대한 크루즈의 침실 미로 찾기 싫어 나가지 않는다. 밤에 타서 새벽에 내리는 잠깐의 이동수단의 크루즈가 아닌 밤낮으로 즐길 수 있는 크루즈는 참 낭만적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