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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숲 Feb 20. 2020

여름 비 머물다 지나가던 숲

- 비가 내린 후의 숲은 어느 때보다도 청량감을 주었습니다

여름의 숲에서는 종종 비를 만나곤 한다. 여름의 습한 물방물들이 한데 모여있다가 공중의 삶을 미련 없이 떠나고 싶을 때, 후드득 후드득 소리를 내며 일제히 떨어진다. 그렇게 내린 비는 때로는 하루 종일 이어지기도 한다. 그해 여름, 방태산 자연휴양림에 갔을 때도 그랬다. 높은 곳에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았던 비는 제법 어둑해져서야 가늘어졌다. 그렇게 종일 비가 내리는 숲에서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먼저 투둑 투둑 타프 위로 떨어지는 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주 커다란 우산을 쓰고 앉아있으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밖은 모험으로 시끌시끌한데 우산 아래는 평온한듯한 그런 기분은 참 달콤하다. 따뜻한 여름 비는 바람을 타고 들이치고 나의 어깨에도 흔적을 남긴다. 빗방울들을 톡톡 털어내고 의자를 당겨 자세를 고쳐 앉아본다. 그렇게 빗소리를 듣다 보니 타프에 빗물이 고인 것이 보인다. 빗물의 무게만큼 내려온 곳을 살짝 들어주면 고인 물이 아래로 쪼르륵 흘러내린다. 빗물은 땅으로 풀 숲으로 스며들고, 나는 갑자기 숲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산책 갈까?

꼬마들에게 우비를 입혀주고 함께 비 오는 숲길을 걷는다. 신기하게도 비가 내릴 때면 숲의 향기는 더욱 진해진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마음이 촉촉해지고 맑은 향기가 피와 함께 내 몸을 도는 것만 같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맑은 날 보지 못했던 민달팽이 같은 친구들을 만나기도 한다. 천천히 숲을 지나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삶에서 속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모두들 나름의 시간을 사는 것인데.

비가 냇가 위로 툭툭 떨어지고 물엔 제법 흙빛이 돈다. 얕은 물은 고요하기 어려운 것 같다. 비의 다이빙에도 맑음을 유지하려면 물이 어느 정도로 깊어야 할까.

물에서 어서 놀고 싶은 꼬마는 비야 어서 그쳐라 하지. 그렇게 여름 비는 종일 이어졌다.  

비가 종일 내리다 보면 텐트 안에 습기가 차 꿉꿉해지기 일쑤. 그럴 땐 리액터만 한 것이 없다. 겨울엔 잠시 온기를 찾아주는 리액터가 여름에는 습기를 몰고 가준다. 오랜 시간 빗속에 있어서 그런가 어깨가 움츠려 들 때 그 빛을 잠시 쬐는 것만으로 몸이 보송보송해진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칙칙 칙칙 소리를 내며 모카포트의 추가 흔들리고 비 오는 숲에 커피 향이 퍼진다. 리액터로 끓인 뜨거운 물 위에 에스프레소가 그리운 마음처럼 섞인다. 그렇게 후후 불어가며 식도를 따라 따뜻한 커피가 들어가고 나면 여름 비를 맞으며 하는 캠핑도 나름 멋진 일이 된다.

다음날, 깨어보니 맑은 날이다. 비를 몰고 왔던 구름은 먼 산 너머 가버리고 창창한 여름 햇살이 강원도 깊은 골짜기 방태산으로 비춰 든다. 오전 한 때의 햇살만으로도 남아있던 물방물들이 흔적을 감추었다. 보송보송해진 텐트와 타프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그 김에 침낭도, 사람도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처럼 말려본다.

아이들은 해가 나온 걸 보자마자 물가로 간다. 물속엔 까만 머리의 올챙이와 작고 투명한 물고기들이 많았다. 움직이는 생명들은 언제나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반나절을 물에서 노는 꼬마들을 보며 카메라에 풍경을 담는다.

점심이 되자 햇살은 제법 뜨거워졌지만 찾아보면 방태산에는 서늘한 그늘이 많아 햇살에 지칠 일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비어있는 데크에 자리를 깔고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배도 부르겠다, 나뭇잎들이 적당히 해도 가려주겠다, 가끔 불어오는 산속 바람에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나무들 사이로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첫날은 빗속에서, 둘째 날은 햇살 속에서 뒹굴뒹굴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읽을 책도 많이 가져가고, 글감 거리도 많이 가져갔지만 사실은 숲에서는 아무것도 않고 숲을 그저 바라만 보는 일이 참 좋다.(여름 숲에 가면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이 마음은 뭘까요?)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텐트를 뒤집고 바닥까지 바람과 햇살이 잘 드나들게 해 주었다. 산 아래는 무더위라지만 강원도의 깊은 숲, 방태산에서는 적당히 내린 비와 무성한 나무들, 차가운 계곡 물로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갑자기, 나도 숲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어지럽히는 일들에도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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